Day 9. In Gdańsk
아침에 이르게 일어났습니다. 새벽 대여섯 시쯤, 푸른 새벽에요. 독일에 오기 전부터 수면 패턴이 꼬여 있었는데, 더딘 시차 적응과 함께 꼬인 수면 패턴이 회복되지 못하면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9일 차인 오늘은 그다인스크로 가야 하는 날이었습니다. 차로 운전해서 가야 해서 — 물론 차 말고 대중교통을 쓸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 방법에 대해서는 굳이 알려 들지 않았습니다 — H의 도움을 받아 이동하기로 한 날이었죠. H에게는 체류 기간 중 쓸 수 있는 차량이 있었거든요. 이런 게 바로 현지에 거주 중인 지인의 가이드를 받을 때 가장 이로운 부분 중 하나겠죠. 감사한 마음으로 H와 만날 시간에 맞춰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12시쯤 H와 만나 H가 모는 차에 탔습니다. 바르샤바에서 그다인스크까지는 약 350km의 거리로, 쉬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운전했을 때 약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는 곳이었어요. 처음 달려 본(?) 폴란드의 고속도로는 다소 혼란스러웠습니다. 인터넷 연결이 종종 끊겼거든요. H의 설명으로는 폴란드 전역에 그렇게까지 인터넷망이 잘 깔려 있지 않고, 심지어 도심에서도 가끔 연결이 끊기는 곳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가다가도 인터넷 연결이 끊어져서 오프라인 지도를 로딩해야 할 때가 있을 정도로요. 인터넷 강국에서 나고 자란 저로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특징이었습니다만, 이역만리에 고작 관광객 신분으로 나와 있는 사람으로서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블루투스를 연결해 음악을 듣다가도 연결이 종종 끊어져 재연결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이따금 있었지만, 화창한 날씨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을 구경하는 사이 고속도로의 길도 점차 익숙해져 갔습니다.
차에 타면 보통은 조는 편입니다. 조수석에 앉은 사람의 도리가 있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저는 일종의 차멀미를 앓는 사람이거든요. 어릴 때부터 차에 타기만 하면 잠들곤 했었죠. 이번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H는 지극히 열심히 가이드를 해주는, 마치 제가 의전이라도 받는 것처럼 저를 대해주었거든요.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곱다고, 너무 극진한(?) 대우를 해주면 저 또한 예의를 차리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습니다. 수면 패턴이 꼬여 너무도 졸렸지만 꾹 참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저는 저의 인생의 일부를 조금씩 들추어 꺼내놓기 시작합니다. 지나간 연애 얘기, 일상의 고단한 부분과 지난한 회사에서의 시간들, 가족사의 애환까지……. 최근까지 서로 아주 친한 사이였다고 말하기 어려운 H로서는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정도의 이야기들까지요. H는 다행히 듣는 귀가 넓고 깊은 사람이어서 저의 자질구레하고 때로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도 잘 귀담아들어 주었으며, 가끔 본인의 이야기도 몇 개 꺼내 들려주곤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운전을 시작한 지 1시간 30분이 지나 있었어요. 장시간 운전의 동반자, 휴게소를 찾아야 할 타이밍이었습니다.
휴게소를 들른다는 것도 아마 혼자서 찾아왔다면 없었을 일이었겠죠. 바르샤바의 고속도로 위 휴게소는 다소 혼란스러웠습니다. H.. 아니 저는 맥도날드에 들르고 싶었는데, 고속도로 표지판도 분명 맥도날드가 곧 나온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가도 맥도날드가 안 나오는 것이었어요. 고속도로 위에서는 갈 수 없는 맥도날드가 보였다 사라지고, KFC도 그런 식으로 사라지고, 저는 폴란드 고속도로의 이상한 표지판 시스템을 욕하며 다음 휴게소에 그냥 들어가는 데 합의하고 맙니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휴게소는 폴란드의 ORLEN이라는 회사(폴란드 매출 1위 주요소 기업)가 운영한다는 휴게소였습니다. 여러 메뉴 중에 어떤 것을 주문해 볼까 하다가 과감히 폴란드식에 도전하기로 합니다. 제가 고른 메뉴는 żurek(쥬렉: 폴란드식 발효 곡물 수프로 주로 호밀을 재료로 함)과 chleb(흘렙: 폴란드 식사 자리에서 주로 먹는 슴슴한 간의 부드러운 빵)이었어요. 주문한 요리는 금세 나왔고, 한입 먹어보니 짜더군요. ‘짜요, 어머님. 짠 거 몸에 안 좋은데……’ 저는 〈거침없이 하이킥〉의 박해미 역이 하던 대사를 따라 하면서 짜디짠 수프를 빵의 슴슴한 간에 힘입어 먹어가기 시작합니다. ‘Biała kiełbasa’라는, 우리말로 하자면 흰 킬바사(흔히들 말하는 그 ‘킬바사’가 바로 폴란드의 이것입니다.)가 들어 있는 스프였고, 소시지는 부드러운 편에 맛도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간이 너무 짜서 그런지 주문한 걸 다 먹지는 못하고 조금 남겼고, 돌아가는 길에 마차가 담긴 병음료를 사서 다시 차에 올라탑니다.
남은 길은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다시 한 시간 반이 더 흘렀고, 저와 H는 마침내 그다인스크에 도착하게 됩니다. 섭씨 30도 정도의 기온에 아주 쾌적하고 따끈한 햇빛 아래였어요. 바다를 우측에 두고서는 사람들이 있는 방향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백사장은 드러눕고 즐길 수 있는 규모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돗자리나 옷가지를 깔고 누워 태양을 온몸으로 껴안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보이기도 했습니다. 폴란드의 햇살은 워낙 강해서 SPF 100 선블록도 팔 정도인데도 이곳 사람들은 그런 강한 햇빛마저 사랑하는 모양이에요. 길을 따라 걸으며 옅은 파스텔 블루 톤의 모자를 각자 쓴 귀여운 남매를 바라보기도 하고, 바닷물 색과 거의 흡사한, 타이어 모양의 튜브를 끼고 노는 가족들도 구경하며 바닷가를 지나갔습니다.
전사한 군인이 잠들어 있다는 십자가 모양의 묘역을 지나 걸어가다 보니 어떤 폐허가 된 건물이 보였어요. 전쟁으로 허물어진 건물 같았습니다. 건물 입구에 놓인 노란 표지판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통행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시무시한 경고를 하고 있어서였어요. ‘CAUTION! Entry at your own risk. Serious hazard to health and life.’라고 적혀 있었거든요. 마구잡이로 간단히 해석하자면 ‘들어가서 건강과 생명에 문제가 생겨도 온전히 네 탓임을 인지하고 들어가라’ 정도가 되겠습니다. 다들 문제가 없으니까 들어갔다 나오겠지 싶어 저와 H는 건물 안을 둘러보러 들어갑니다. 포탄과 총격으로 엉망이 된 건물 내부를 보자니 도대체 전쟁이란 무얼 위한 것이며, 일상에 어떤 잔해를 남기는가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건물을 빠져나오면 기념품을 파는 좌판이 한 방향으로 좌라락 깔려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처음으로 ‘호박(amber)’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합니다. 호박이 폴란드의 특산품이라더군요. 여기서 본 호박 팔찌 등의 기념품은 디자인이 특출나지는 않아서 저의 눈길을 끌지 못한 탓에 구매로는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다만 귀여운 마그넷이 있었어요. 흔한 것들 사이에서 독특함을 자랑하는, 조약돌 모양의 마그넷이었습니다. 발트해 연안의 돌멩이를 떠올리게 하는 모양인지라 저는 이 마그넷에 현혹되었고, 마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기에 더더욱 운명적인 마음을 느끼며 구매에 성공합니다.
구입한 조약돌 마그넷을 소중히 가방에 넣은 저는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라는 기념비를 구경하기 위해 경사진 길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저 멀리 큼직한 모아이 석상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어요. 이곳은 옛 군사 지역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첫 전장이 되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많은 생명이 스러졌고, 그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진 곳이었죠. 의미를 해석할 수 없는 문구가 조각된 석조 기념비를 구경하고서 내려오는 길에는 탁 트인 바다의 모습과, 벤치에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나누다 이내 일어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 같은 평화로움을 감상했어요. 반짝이는 윤슬과 펄럭이는 흰색과 빨간색의 폴란드 국기, 그리고 파아란 하늘과 뽀얗고 부드러운 구름들……. 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상징하는 것들을 뒤로 하고 바라보는 풍경으로 삼기에는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 만큼, 평화롭고도 안온한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주황색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한 남자아이를 만났어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그 아이가 엄근진 표정으로 자전거를 귀엽게 몰고 있기에 연신 함박웃음이 지어졌습니다. 그다인스크 해안을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는 바다에 들어가 비치볼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괴롭히는(?) 또래 형제의 싸움을 관전하기도 했습니다. 기나긴 해가 떠날 줄 모르는, 따뜻하고 밝은 늦은 오후의 햇빛 아래 해안을 떠난 H와 저는 그다인스크 숙소로 체크인하러 출발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제가 평균 숙박비로 책정한 금액은 1박에 20만 원 정도였어요. 그다인스크의 숙소는 예외였습니다. 예상 금액의 거의 두 배가 되는 금액을 치르고 예약한 숙소였어요. 도착하기 전까지는 너무 과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혼자 묵는데 40만 원 가까이 되는 금액이라니 다소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거든요. 체크인을 마치고 배정받은 방에 들어간 순간, 저는 그 금액을 기꺼이 치렀어야 한다고 느낄 정도의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깨끗하고 아늑한 방의 분위기도 좋았지만, 창밖으로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뷰가 보였기 때문이에요. 적갈색의 벽돌이 차곡차곡 쌓인 건물들과 한가로이 바닷물 위를 떠다니는 유람선들, 저 멀리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관람차, 그 앞에 고딕체로 놓인 GDAŃSK 심볼, 물결 위에서 세차게 일렁이는 윤슬……. 어떤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응당 지불해야 하는 값이 있다는 걸 그 뷰를 보면서 기쁘게 깨닫게 됩니다.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바로 호텔 앞의 거리로 나섰습니다. 호텔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어떤 기념품 가게가 있었어요. 들어가자마자 퀄리티 좋고 예쁜 마그넷들이 한가득 시야에 담겨서 저의 정신이 잠시 혼미해집니다. 그다인스크 길거리에 있는 예쁜 건물들의 모양을 본뜬 마그넷들과 바닷가를 상징하는 것들이 담긴 마그넷들까지, 하나하나 저마다의 특색이 살아 있고 마감이 훌륭했어요. 지인들에게 줄 선물과 집 냉장고 문에 붙여둘 저를 위한 선물까지 한 아름 기념품을 사서 나옵니다. 가게를 나서니 오른편에 이어지는 좌판에서는 호박으로 만들거나 호박이 세팅된 주얼리들을 팔고 있었어요. 조약돌 마그넷을 살 때 근처 좌판대에서 보았던 호박 기념품들의 퀄리티를 훨씬 상회하는, 세공이 잘 된, 예쁜 디자인의 반지와 귀걸이 목걸이들이 보였습니다. 그중 저는 적갈색과 짙은 녹색의 호박이 세팅된 반지에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사실 한 사이즈 작으면 딱 좋겠다 싶었는데 그것뿐이래서 방법이 없더군요. 그냥 살 수밖에요. 고른 걸 포장해 줄 때 점원이 뭘 넣는다 했더니 나중에 보니 100% 발트해 산 호박이 맞다는 보증서였더군요. 이미 예쁜데 출신 성분(?)까지 분명하다니! 구매 만족도가 5%쯤 올라갑니다. ‘나를 위한 선물’ 시리즈는 계속해서 갱신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다인스크는 독일의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관광지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가게에서 판매하는 기념품들의 수준도 높고, 식당들도 맛있는 음식을 판매하는 곳이 많은 것 같았어요. 저와 H가 저녁을 먹기 위해 방문한 곳은 타이 식당이었는데, 여기서 먹은 폴란드의 수제 맥주와 그린 커리는 아직도 잊기 어려운 맛이 되었을 정도로 맛이 있었습니다. 왼편으로 유람선이 떠나는 광경이나 행복한 얼굴로 거리를 걷는 유럽인 관광객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저녁 식사는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하고 즐겁게 마무리됩니다.
훌륭한 식사로 에너지를 한껏 채우고는 그다인스크의 거리를 조금 더 둘러보기로 합니다. 어둑해진 하늘 위에서 호박의 오렌지빛으로 빛나는 관람차도 보고, 높이가 높은 배를 떠나보내기 위해 하늘로 한끝을 천천히 올리는(?) 다리도 바라보고, 앉은 채로 다리를 다 뻗을 수도 있는 널찍한 벤치에 앉아서 하염없이 달빛에 반사되는 물빛을 바라보기도 했어요.
‘아름답다’는 말을 가장 많이 연발한 곳. 가는 곳마다 평온과 평화가 깃들어 있어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곳임을 믿을 수 없었던 곳. 먹고 마신 모든 것이 훌륭했던 곳. 뛰어난 품질의 호박 주얼리와 기념품을 팔던 곳. 건물이 각양각색으로 예뻐 구경하는 재미가 가득했던 곳. 곳곳에 흐르는 바닷물이 쏟아지는 햇빛과 달빛을 눈부시게 반사해 내던 곳……. 그다인스크는 그렇게 저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아름답고 황홀한 곳으로 기억될 준비를 마칩니다. 단 하루였지만 폴란드에서 보낸 시간 중 가장 찬란한 시간을 선물해 주고서 말이죠.
01/10/24
임우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