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8. From Berlin to Warszawa
9시 52분. 제가 예약한 기차의 출발 시간이었습니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출발해서 바르샤바 중앙역에 내리는 직행열차였어요. 총 소요 시간이 무려 5시간 25분에 달하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일등석으로 좌석을 지정해 예약해 둔 표였죠. 일어났을 때 시간은 제법 여유가 있었습니다. 처음 사진을 찍은 시간이 오전 8시 15분이거든요. 묵고 있던 숙소에서 베를린 중앙역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더라도 20분 안에 갈 수 있는 곳이었고요. ‘여유가 있다’는 비교적 드문 감각 속에 저는 준비를 시작합니다. 너무도 좋았던 베를린의 숙소를 떠나려니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단 이틀만을 묵기에는 너무 훌륭하고 아늑한 숙소였어요.
숙소엔 네스프레소 커피 머신 한 대가 있었습니다. 사용량이 얼마나 적었는지, 물통에 꽤 오랜 세월이 묻어 있었어요. 하루 전에 그 물통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잘 닦아놓고는 건조시켜두었던 참이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왜 그 물통을, 설거지를 직접 한 물통을 써서 커피를 한 잔 내려 먹고 싶어졌던 걸까요. 저는 물을 조금 부어서 마음에 드는 잔을 닦아두고는 룽고 한 잔을 조심스럽게 내립니다. 커피를 내리고선 창가 쪽이 보이게 테이블에 얹어두고는 사진도 찍고, 그때까지는 넘실거렸던 평화 속에서 따끈한 커피를 마셨죠. 바깥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준비는 짐만 조금 마치면 다 끝나고, 이보다 더 완벽하고 수월한 아침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기차 시간이 30분 앞으로 다가와 있었어요. 잘 싸둔 수트케이스 위에 빵빵해진 보스턴백을 올려 두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갑니다. 체크아웃 때 키만 돌려드리면 될 거라는 생각이었는데, 도시 세도 계산해야 한다더군요. 계산을 마치고 보니 시간이 그새 5분이 지나 있었습니다. 탑승 시각 25분 전. 슬슬 다급해지기 시작했어요. 우버를 부르면 10분이면 기차역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직원은 말해줬습니다. 그러면서 택시를 자신이 잡아주는 게 낫겠는지 묻더군요. 이때 저는 Yes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우버를 부르는 게 더 저렴한지 물었을 때 우버가 더 저렴한 게 맞다고 확인해 주기에 제가 직접 잡아서 가겠다고 해버렸거든요. 그리고 그게 이 아침의 가장 큰 패착이었습니다.
숙소와 베를린 중앙역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였는지 뭔지 모르겠습니다. 우버는 부르는 족족 취소당했습니다. 3분 거리에 있는 기사가 잡혔다가 바로 취소, 그다음에 또 3분 거리에 있던 다른 기사가 잡혔다가 또 취소, 초조함 속에 제발 취소되지 마라, 취소되지 마라 하는 사이 4분 거리의 기사가 잡혔고, 다행히 취소 없이 달려와 주었습니다. 문제는 기사와 저의 소통에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독일 여행 중에 저는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카페에서도, 식료품점에서도, 식당에서도 모두 원활하게 독일인 직원들과 영어로 소통해 왔는데, 이 기사님은 독일어만 하시는 거예요. 제가 52분 기차니까 서둘러 달라고 말씀드렸는데도 어깨를 씰룩이며 ‘나는 교통 법규를 준수하며 되는대로 갈 뿐이지, 더 빨리 갈 수는 없다’는 뉘앙스만 잔뜩 풍기면서 다른 어떤 약속을 하지도, 하다못해 빠르게 가보겠다는 의지도 내비치지 않으셨습니다.
독일의 철도청인 DB(Deutsche Bahn)은 연착이 하도 많아서 ‘Delay Bahn’이라는 별명이 있었어요. 저는 딜레이반의 마법이 부려지기를 기대하며 애플리케이션을 몇 번이고 드나들었지만, 애석하게도(?) 이 기차는 연착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교통법규를 완벽하게 준수하는 기사님의 안전 운행 속에 시간은 속절없이 줄어만 가고, 저의 속은 숯검댕이처럼 까맣게 까맣게 타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9시 50분이 됐고, 저는 기차역 맞은 편의 횡단보도에 겨우 내릴 수 있었어요.
‘나를 위한 선물 시리즈’가 계속되면서 저의 짐은 한국에서 출국할 때보다 이미 많이 무거워진 상태였습니다. 수트케이스는 한 3kg이 늘어 19kg 정도였고, 거의 비워 온 보스턴백에도 몇 킬로그램의 짐이 들어가 있었죠. 한 마디로, 그걸 다 이고 지고 뛰는 건-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52분 기차를 타야 하는 제가, 2분을 남기고 달리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근력도 없는 주제에 저는 혼신의 힘을 발휘해 짐을 끌고 뛰기 시작합니다. 숨이 헐떡이고, 시간은 바쁘게 달아나기만 하고, 이 기차를 놓쳤을 경우 지불해야 할 시간적, 금전적 기회비용을 계산하는 사이 어느덧 시간은 9시 53분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야 하는 플랫폼에서는 어떤 행선지를 확인할 수 없는 기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죠.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제 머릿속에 그때 가득 차 있던 글자는 딱 이 세 글자였습니다. ‘X됐다…….’
잔뜩 울적해진 채로 플랫폼에 가서 다음 바르샤바로 가는 기차가 뭔지 찾아보려 했습니다. 탈탈 털린 마음으로, 또 바닥난 체력으로 겨우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보는데 갑자기 전광판 뒤에 후광이 비쳐요. 9:52라고 적힌 원래의 출발시간 옆에 9:59라는 다른 시간이 적혀 있었습니다. 조금 전 제 눈 앞을 지나간 열차는 제가 타야 할 기차가 아닌 다른 거였고, 제가 탈 열차는 7분이 연착됐던 거예요.
저에게는 부끄럽지만 ‘철도청의 딸’*이라는 별명이 이미 붙어 있었습니다. 10시 20분 기차를 10시 19분, 20분에 맞춰 와서 겨우 타던 악질인데, 늘 운이 좋게 열차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던 덕에 붙어 있던 별명이었죠. 9시 59분으로 바뀌어 있는 열차 시각을 보고 저는 대한민국 철도청의 딸이 ‘글로벌 철도청의 딸’로 새롭게 진화하는 기분에 잠시 취합니다. 물론 2-30분 여유를 두고 숙소에서 출발했다면 더 좋았겠죠. 하지만 이렇게 놓칠 줄 알았던 열차가 7분의 연착으로 저에게 탑승 기회를 주었을 때 그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 것이기도 했더랬습니다.
EC45, 폴란드로 향하는 기차에는 그렇게 무리 없이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기차를 놓칠 뻔했을 때의 그 초조함과 안달복달해졌던 마음을 식당 칸에서 맥주 한 잔과 소시지 같은 것으로 잠재우고는 탑승권에 적힌 좌석 번호를 찾아갑니다. 열차 안의 분위기는 독일에서 이동할 때 타던 RE, ICE 열차와 판이한 분위기였어요. 폴란드와 독일이 이렇게나 인접국인데도 인프라의 수준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저는 속으로 조금 놀라고 맙니다. 일등석으로 잡아 둔 저의 자리는 6인이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의 한 칸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미닫이 철문을 열면 양옆으로 마주 보는 자리가 3개, 3개씩 있는 그런 칸이었죠. 혼자서 앉아 있는데 같은 칸 안에 아시아계 여성 두 분이 들어오셨어요. 들어오시면서 미국식 영어로 대화를 나누시는 걸 보니 중국계 미국인인 것 같았어요.
낯선 사람 두 명과 한 셀에 같이 들어와 있는 이 상황. I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럴 때 보통은 말을 아끼는 편입니다만, 5시간 25분의 여정 중에 식당칸에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데 쓴 시간이 약 30분 정도로- 앞으로도 5시간 가까운 여정이 남아있었던지라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스몰토크를 시작할 결정을요. “어디서 오셨어요?”, 저는 조심스럽게 영어로 옆에 앉아 계신 분께 말을 건넵니다. 그분들은 서로 자매 사이로, 독일에서 여행을 시작해 폴란드에서 크루즈 여행을 계획 중인 중국계 미국인이셨어요. 어디서 여행했는지,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더 남아 있는지, 어디를 좋아했는지, 너(저)는 어디서 영어를 배웠는지 모르겠는데 영어를 잘하네, 한국에서 배웠어요, 감사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시간이 느슨하지만 분명하게 세 사람 사이를 흘러갔습니다. 중국 가려면 비자가 필요해서 아직 여행은 못 갔다, 중국에 좋은 곳들 많으니 한번 놀러 가 봐라, 그런 이야기들을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엉덩이가 뻐근해질 정도로 오랜 여정을 기차 위에서 끝마치고 나서, 짐을 다 챙겨서 빠져나올 때 저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둘 중 언니로 추정되는 분께서 “Safe trip!” 하며 웃어주셨어요. 저도 즐거운 여행 되기를 바란다고 화답했죠. 그 짤막하지만 확실한 응원의 말 덕분에, 폴란드에 발을 딛는 첫 순간부터 어떤 가호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올해는 이상하게 해외 각지에 지인들이 많이 흩어져 있는 해입니다. 독일에서도 그랬고, 폴란드에는 또 다른 동기 H가 체류 중이었죠. 저와 H는 신입사원 극초기, 그룹사 연수를 할 때부터 팀장과 팀장의 팀장으로 알게 되어 같은 회사, 같은 사업부로 발령받았던, 꽤 오랜 인연을 자랑하는 동기 사이였습니다. 같은 사업부로 시작했지만 저와 H는 처음 근무를 시작한 지역도 달랐고, 저는 만 10년의 회사 생활 중 초반 3년쯤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지역의 다른 사업부에서 근무해 오기도 했습니다. 연수 초반 힘들고 지치기도 하는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 꽤나 친한 사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런 시간과 공간의 제약 사이에 H와는 천천히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H는 작년 봄쯤 제가 근무하는 건물로 전배를 오게 됩니다.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는 글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와 그에게 빗대 이 문장을 재구성하자면 이렇게 바뀔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일이 어렵다는 이유로 도망치는 사람과 일이 어렵다는 이유로 더 깊게 파고드는 사람. 직장인은 이렇게도 나뉜다.’
H는 제가 아는 사람 중 아주 드물게도 ‘일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들보다 이른 출근을 하고 늦게 퇴근을 하는 데도 H는 별다른 불평불만이 없었습니다. 보고서를 쓰는 게 재미있다니! 저는 그 말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만, 회사에서의 자아를 전체의 1할 정도로 낮게 치는 저에 반해 회사에서의 자아가 크고 건강한 사람이겠다, 그 정도의 생각을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열심히 일 잘하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제공하고 있는 몇 가지 양성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되고 싶어 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무려 1년을 해외에서 ‘일하지 않고’(일부 일하는 시간이 있다고들 합니다만) 체류하면서 이문화(異文化)를 경험해 볼 수 있는 제도였죠. H는 그 제도의 혜택을 받는 일원이 되기로 2019년에 운명이 정해진 사람이었습니다.
팬데믹이 들이닥치고, H의 출국을 단 3일 앞둔 시점에 이 제도가 갑작스럽게 홀딩되며 대상 인원 모두 현업 부서에서 표류하게 됩니다. H는 엔데믹이 올 때까지 한두 번 조직을 더 바꾸고, 가장 마지막으로 조직을 바꾸면서 제가 일하는 건물의 본사 스탭 부서로 전배를 오게 된 것이었죠. 전에 있던 조직보다 조금 더 타이트하고 소위 ‘빡센’ 조직임이 분명했습니다. 전체 인원이 약 20명 정도 되는 이 부서에는 남자뿐이었고, 같은 부서원들의 직급도 상당히 높아 보였습니다. 10년 차가 넘어가면 통상 막내일 수가 없는데, 조직도를 보면 막내급이겠더군요. 제가 출근을 8시에 하면 H는 7시에 했고, 제가 퇴근을 6시에 한다면 H는 6시에야 언제 퇴근할 수 있을지 퇴근 시간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루빨리 회사 밖의 자아를 찾아 멀리멀리 떠나는 저와는 너무도 다른 삶을 ‘기꺼이’ 사는 H를 저는 어떤 부분은 존경하고, 어떤 부분은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저렇게 조금씩 자신의 어떤 부분을 마모시키며 사는 건 아닐까 해서요.
그런 H가 바르샤바 중앙역, 제가 내릴 플랫폼에 미리 도착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려서 잠시 헤매는 사이 H에게서 걸려 온 보이스콜을 놓쳤고, 그걸 확인하자마자 콜백하고 인사하는 첫 몇 글자를 들을 때쯤 제가 고개를 돌렸을 때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H가 보였습니다. 그 꿀 같은 제도의 수혜자가 되어 폴란드에서 생활한 이후 줄곧 알람이 필요하지 않은 날들만을 보내왔다고 하더니, H는 어느때보다 편안해지고 맑아진 인상이었습니다. 덩달아 마음이 조금 해사해졌습니다. 그렇게 힘든 삶을 기꺼이 감내하며 살아왔다고 했지만 막상 모든 게 풀어지고 늘어져도 되는 생활 속의 그는 더없이 편안하게 허물어져 있구나. 치열하고 복잡하고 밀도 높았을 10년을 지나 보낸 후의 H에게, 이런 안온하고 평온한 시간이 더없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직감을 했습니다.
성격대로 일하듯 열심히 가이드해주기를 시작한 H의 안전한 운전 속에 저는 바르샤바의 첫날 묵을 숙소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바깥으로는 문화과학궁전이 보이고, 따뜻한 햇살이 방 안을 가득 비추는 저의 객실에 체크인했습니다. 짐을 대충 풀어두고는 초저녁쯤 외출하여 구시가지 일부를 둘러봅니다. 헝가리와 체코 이후 7년 만에 만난 또 다른 동유럽국가인 폴란드는 기존에 여러 차례 경험했던 서유럽 국가의 정취와 많은 부분이 달랐습니다. 어떤 부분들은 인턴 시절 몇 개월 체류한 적이 있는 튀르키예를 연상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표지판들은 파랑과 빨강이 꼭 함께 들어있었고, 군데군데 인터넷 전파가 끊기는 등 연결이 원활하지 않은 곳들도 왕왕 발견되었지만, 작은 규모의 공원들도 그마다의 매력을 자랑하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시였어요.
성당을 잠시 들러 구경하고 나와서 탑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길거리 한복판에서는 소셜미디어에 올릴 숏폼 영상을 찍는 데 활용할 수 있다는, 360도로 돌아가는 조명이 달린 카메라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Lody***’라고 불리는, 폴란드의 아이스크림 집에 들어가 주문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은 적당히 고소하고 달콤하고도 부드러웠습니다. 여름 저녁의 열기는 한낮만큼은 안되더라도 여전히 따스해 길을 걷는 내내 차창을 아름답게 비추었고, 처음 보는 광경의 생경함에 순간순간 감탄을 하며 길을 걷고 있자니 시간이 어느덧 저녁의 한가운데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성곽을 구경하려다 불이 나 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기에 발걸음을 돌려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습니다. H가 지인이 올 때마다 소개하고 있다는 스테이크 집에서 먹은 타르타르와 스테이크의 맛은 훌륭했고, 곁들여 마신 레드와인과도 페어링이 좋았습니다.
독일 여행을 며칠 하고 넘어온 저의 입맛을 달래주기 위해 H는 2차 장소로 한식당을 제안했습니다. 맛깔스럽게 볶아져 나온 제육볶음을 한 입 하면서 소맥을 털어 넣고 있노라니 오늘 아침에 허겁지겁 베를린 중앙역에 달려가며 온 영혼을 탈탈 털렸던 저의 모습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더군요. 수트케이스 위에서 위태롭게 버티다 떨어지곤 하는 보스턴백을 움켜쥐고 달리던 제 다리의 후들거림이 제육볶음으로, 또 환상적인 비율로 타진 소맥과 함께 전달된 고향의 맛으로 살살 잠재워지고 있었습니다. 낯익은 H와 낯선 이국의 한식당에서 낯익은 요리를 먹으며 건배를 한 번 더 했습니다. 바르샤바와 저의 인연은 그렇게 낯익음과 낯섦의 레이어에 겹겹이 둘러싸이는 가운데 맺어지는 중이었습니다.
14/09/24
임우유 드림.
* ‘철도청의 딸’과 관련해 이전에 썼던 글을 참고차 각주로 공유합니다.
** 요조 작가님의《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중에서
*** 폴란드어로 아이스크림을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