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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Aug 01. 2020

예비남편이 회사에서 번호를 따였다

A문고 사건

Chapter 1. 내가 너의 여자친구였을 때



 2월 5일 금요일, 결혼 D-309



 ‘네가 화낼지도 모르겠지만’이라는 말을 본다면 우선 화낼 준비를 하는 게 좋다. 화낼 내용을 얘기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침 9시가 채 되기 전의 메시지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지. 아침에 출근하려고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갑자기 뒤에서 어떤 여자가 나타나더니 책을 한 권 주고 갔단다. 호떡과 출근 시간이 비슷해서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는데, 책을 열어보니 명함이 하나 끼워져 있었다고. 책 주셔서 고맙다고만 하려고 한다며, 이걸 갚아야 되는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본인보다 나이가 한두 살 많아 보이고 직급은 대리라나 뭐라나. 본인 스타일은 아니었다고 둘러댄다.


 이런 일이 아예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기에 사실 이런 에피소드 정도야 그래, 네 얼굴이 그 사람한테 조금 먹혔네, 웃고 넘기면 그만이어야 하는데 마지막 대목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갚아? 뭘 갚아?


 자꾸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만다는데 문자를 보내서 굳이 본인 번호 알려줄 필요 없이 그냥 책을 돌려주면 될 일이라고 말했다. 여자도 남자도 사실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10원 한 장 쓰기 싫어하는 건 똑같지 않은가. 게다가 목적성이 너무 뻔해 보이게 책 속에 자기 명함을 넣어 주었다면 더더욱. 그냥 고마우면 책 주신 건 감사한데 제가 여자친구가 있다, 말을 하면 되지 않냐고 했더니 알겠다고, 문자 하겠다고 하기에 이렇게 일단락이 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뭐라고 보냈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건네준 책은 잘 받았다,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하고 올라와버렸다, 다음에 뵙게 되면 인사라도 드리겠다. 주말 명절 즐겁게 보내세요, 라고 보냈다고 했다. 어쭈? 야, 너 왜 여자친구 있다고 안 해! 얘 이거 웃기네.


 답장도 왔단다.


 ‘아니에요. 제가 서점에서 일하니까 부담 갖지 말고 연휴 기간에 읽어보세요. 읽어보시고 재밌으면 연휴 끝나고 커피나 한 잔 사세요.’라고 왔다면서 이 상황에 자기가 여자친구 있다고 하면 웃기니 본인도 책 한 권 사서 주고 말 거라고 했다. 아니 뭐 이런 대처가 다 있지? 애초에 처음에 문자로 ‘주신 책 잘 받았는데 제가 여자친구가 있다.’ 한 마디만 했으면 깔끔하게 끝났을 일을 뭐? 책은 또 왜 사준대? 아, 몇 년이 지난 일인데 쓰면서 다시 혈압이 오른다.


 자꾸 본인도 낯짝이 있는데 어떻게 받기만 하고 퉁 치냐고, 자기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핸들링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친다. 처음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문자하고 말았으면 됐잖아? 왜 일을 키우지? 이해가 가질 않는데 회사 동기도 아무리 의도가 보인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대놓고 여자친구가 있다는 둥 하면 조금 그럴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회사 앞에서 언제 또 마주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대놓고 면박 주는 것처럼 굴기도 어려웠다고. 이야기가 길어지니 결국은 이럴 거면 앞으로 이런 일은 얘기 안 하겠다고 푸념을 한다.


서로의 관계에서 가장 1순위가 되어야 할 것은 상대방의 감정과 그 감정을 배려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이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처음부터 내가 하라고 한 대로 대응하지 않은 것, 여자친구 있다고 하면 좀 이상할 것 같다고 했다는 동기의 말을 수용한 것, 회사에서 다시 볼 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남인 그 A문고 여자를 더 배려한 점이 너무 화가 났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보다, 이런 일을 이렇게 대응하는 게 너무 화가 나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써서 결국 없었어도 될 감정 소모를 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본인과 나의 생각이 달라서 일어난 일이며 나를 덜 배려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항변을 끝으로 이 일은 우리를 지나갔다. 아, 연휴가 지나 호떡은 결국 책을 돌려주러 A문고 층에 올라갔고, 그 여자분은 없어서 다른 분에게 ‘책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만난 여자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책장에 꽂아두기가 어렵습니다. 실례인 줄은 알지만 다시 돌려드립니다.’라는 포스트잇을 넣은 책을 넘김으로써 이 일을 정말로 마무리지었다.


 진작에 좀 보내지. 어휴, 책은 또 왜 읽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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