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2월 27일 토요일, 결혼 D-287
여자친구나 아내, 또는 사랑하는 어떤 사람, 특히 여자가 무언가에 대해 토로할 때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이것만 주의하더라도 상대가 가질 수 있는 불만의 3할 정도는 자연 소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해결을 하려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은 해결이 될 수 없다. 해결이 될 수 있었다면 애초에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해결하고 말 일이지.
회사를 다니면서 어찌 좋은 일들만 있겠노라고 답할 수 있을까. 그날도 뭔가 치이거나, 힘들었거나, 우리 부서 꼰대 때문에 죽도록 괴로웠던 날이었을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는지까지는 기록에 없어 복기할 수 없지만 아무튼 소박한 직급의 나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어떤 것.
‘나 요즘 너무 힘들어, 그 사람 정말 짜증 나’ 같은 말들을 많이 하게 되는 전화의 끝에 결국 싸우고야 말았다. 나는 사실 별 거 아니고 그냥 네가 내 편만 좀 들어주면 되는 거였는데, 꼭 내가 누군갈 이상하다고 투정 부리면 ‘네가 이상한 건 아닐까?’ 또는 ‘그 사람도 이상하게 할 수밖에 없게 된 뭔가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거야’ 류의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위로랍시고 내뱉는 호떡에게 화가 진득하게 났겠지. 전화하다 말고 나는 서러움이 복받쳐 결국 울어버리고, 우는 나를 제대로 달래지도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리게 만드는 서로 지쳐버리는 폐허 같은 통화.
싸움이 미처 봉합되지도 못한 채 잠부터 들어버리고 나서 맞은 다음날 오후, 호떡에게 연락이 왔다.
― 친구들은 저녁에 만나? 기분은 좀 풀렸어?
풀렸을 턱이 없다. 응. 아니.라고 대답했다. (친구들은 저녁에 만나고 기분은 안 풀렸다는 말이다)
― 어제는 미안해
나도 내가 아프거나 짜증 날 때
네가 무조건 내 편 들어주길 바라면서
어제는 내가 못 그랬던 거 같아 미안해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랬어? 어제의 통화를 생각하니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래도 미안하다고 말해주니 화를 좀 풀어야지. 어제는 내가 정말 너무 힘들었고, 내가 자꾸 뭐라고 하고 울기만 하니까 기분 상했겠지만 어젠 진짜 내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 그래 앞으로는 안 그럴게
남자는 원래 그런 종족이라 그런 거니까
기분 풀고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많이 해 먹어
― 로꼬 ‘감아’ 가사를 보면
남자가 원래 그런 종족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남자 탓하지 마 남자라고 다 안 그래
― ㅋㅋㅋ 아오 알..았..어..
― 오늘 친구들 만나지? 책 사건 꼭 물어보고
A문고 사건에 대해 꼭 여자인 친구들을 만나 직접 물어보라는 당부를 끝으로 싸움이 끝났다.
호떡은 이날도, 다른 날도 본인의 실수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싸움에 ‘남자라서’ 그렇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지는 않고 ‘남자라서’ 그렇다는 탓을 할 변명거리도 못 되지만 호떡을 나무랐던 나조차 남자들이란 꼭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 버릇이 있어서 이런 실수들을 저지르고야 만다는 걸 알고는 있다. 그런 면에서 로꼬 ‘감아’ 가사는 정말 일대 혁명이었다.
너의 하루는 어땠어 / 느껴져 딱 목소리에서
누가 또 네 심기에 손댔어 /
맞아 전부 그 사람이 잘못했어
이 노래를 듣던 날 ‘유레카’스러웠던 나의 들떴던 마음이 생각난다. ‘맞아 전부 그 사람이 잘못했어’지 바로 저거지. 이제 뭔 되도 않는 해결책 제시 같은 거 하려 드는 호떡에게 이 가사를 얘기해줘야지.
그날 뒤로도 나는 종종 로꼬의 ‘감아’ 가사를 들먹이며 남자 탓하지 말라는 충고를 여러 번 했다. 그리고 그 가사를 지은 로꼬에게는 모종의 호감이 생겼더랬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남성분들(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이여, 제발 사랑하고 아끼는 여자분이 힘든 점에 대해 말할 때는 그저 들어주고, 또 들어주고, 누가 싫다고 하면 상대가 싫어하는 것보다 10%만큼만 더 싫어하는 척해주고, 그냥 알았다고 해주세요. 여러분은 상대의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공감만이 살 길입니다. 여자들만이 공감을 너무 바라서 힘들다고 생각했다면 손에 가슴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위로가 필요해서 누군가에게 손 내미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하소연하고 어려움을 토로할 때 공감보다 어설픈 해결책 제시가 먼저 끼어들면 과연 기분이 좋기만 할지. 아닐 걸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마 정말 그렇진 않을 것이다. 나에게 늘 해결책만을 제시하던 호떡도 본인이 위로받을 입장이 되었을 때엔 위로와 공감을 더 필요로 했었거든.
만 6년의 연애와 만 3년의 결혼 기간을 합쳐 보아 온 바로는 우리 모두는 힘든 순간 사랑하는 사람의 공감과 위로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서로의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만큼 대단하지는 않은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