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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Oct 22. 2023

현장에서 보면 사고, 지나고 보면 해프닝

   4시 45분. 마음속으로 이미 정해둔 다섯 시 퇴근을 앞두고 심장이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귀신처럼 내 뒤에 서늘하게 선 파트장은 내게 답이 정해진 질문을 한다. 지금 저랑 같이 통화하실까요?


   지금은 일종의 영업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상대 부서와의 통화는 마음 같지가 않다. 예컨대 파트장과 내가 입시 학원의 원장과 입시 코디네이터라고 치자. 우리는 어느 집의 자제를 수강생으로 받아서, 그들에게 우리가 아는 노하우와 모든 시스템을 총동원하여 그들이 바라는 입시용 포트폴리오를 짜주고, 서로가 협의한 어느 수준 이상의 시험 성적을 내게 해준다.


   원래의 논의대로라면 강사인 나와 어떤 집(상대 부서)의 누군가를 우리는 ‘우리 학원에서’ 가르치기로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집 사람이 우리더러 비밀과외를 해달라는 거지. 우리는 그 집 자식이 어떤 시험을 봐서 성적이 나오기 시작하면 ‘본원 수강생 누구누구 합격’이라고 전단지에 실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 ‘학원 수강’이라는 개념 자체가 통째로 빠져버리게 된 것이다.


    그 집  “과외를 하는 건 안 돼요?”

    우리   “아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럼 저희가 전단지를 못 뿌려요.”

    그 집  “그러면 전단지를 안 뿌리면 되잖아요.”

    우리   “아니 그럼 전단지 자체를 뭐 하러 만들어요…….”


   원장님(파트장)의 미간 사이로 주름이 미친 듯이 깊게 패기 시작한다. 지난한 통화 사이로 퇴근 시간으로 목표했던 다섯 시는 이미 지나버린 지 오래. 설상가상으로 그 집에 수강생이 되기로 했던 분은 또 하필 원장님과 입 케미가 안 맞는 분이라 중간에서 입시 코디네이터(나) 역할을 하는 나는 그들 사이를 조율하느라 있는 에너지 없는 에너지를 다 써야 했다. 우리 원장님은 목소리가 너무 컸고, 그 학생은 모기만 한 소리를 내면서 죽 끓이는 듯한 뭉근한 톤으로 계속 대화를 뭉갰다. 나는 뉴런이라도 공유한 사람마냥 뭉근한 그 톤 속에 담긴 요지를 어쩐지 다 이해할 수 있었으나 목소리가 큰 우리 원장님은 그분의 말투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고, 자꾸 학생의 말을 가차 없이 끊어댔으며, 나는 끊긴 학생의 말을 어떻게 저떻게 이어 붙여 다시 원장님 앞에 대령해 대기 바빴다. 그러고서 결국 그날의 소동은 수강생이 학원 등록을 포기하기로 하면서 일단락지어지게 되었다. 이게 또 뼈아팠다. 미친 듯이 저리고 넌덜머리가 났다.


   이런 지지부진한 논의가 있은 뒤 집에 가는 길은 몹시도 괴롭다. 애초에 희망했던 퇴근 시간을 지나쳤을뿐더러, 얻은 소득은 하나 없고, 진이 쏙 빠진 채로 러시아워를 정통으로 관통하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한 마디로 넋이 나간 채로 나는 기나긴 통근길에 올랐고, 두 번의 환승을 했으며, 120분여 퇴근길 끝에 집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러고 한숨이 안 나오면 그게 사람인가? 아닐 것이다. 나는 너무도 사람이라 그날 겨우 도착한 집 현관문 앞에서 조금 울 것 같았고, 문이 열리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으며 밥을 해 먹을 힘이 없어 헛된 배달 음식을 시켜 배를 불려야 했다.


   그 입씨름을 하고 아무것도 못 얻은 지 3개월이 지나 보니 그날의 그 논의가 지금은 또 매우 어이없고 웃긴 에피소드가 되어 있다는 게 재미있는 포인트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그 집의 다른 형제가 또 다른 수강생이 되어 우리 학원에서 성적을 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전의 그 집 자제보다 훨씬 더 공부에 열의가 있고, 성실하게 학습하는 스타일의 학생이 제 발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감히 직장생활 10년의 짬바를 버무려 말해 보자면, 직장 생활의 순간순간은 고통이나 지나고 보면 꽤나 웃긴 구석이 자연 발생한다. 고통이 함께하는 순간엔 나중엔 이게 웃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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