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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Oct 22. 2023

출근을 사랑하는 방법

   새벽같이 일어났다. 베를린으로 가야 하는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부스스한 눈을 고쳐 뜨며 집에서 나오니 동이 트기 전 어스름의 푸른 빛이 공기 중에 가득했다. 아침의 인천국제공항은 한산하지도 사람들이 바글거리지도 않았고 모든 수속은 순조로웠다. 유일한 괴로움은 열세 시간이 넘는 비행뿐이었다.


   베를린은 힙한 사람들이 많고 핫한 클럽이 어떻고를 떠나 코로나가 닥치기 전부터 “그냥” 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곳이었다. 이 도시 저 도시 이동하지 않고 한 도시에 며칠을 머무르기로 한 최초의 여행지이기도 했다. 항공편 티켓을 발권하고 숙소를 잡은 뒤로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지만 그래서인지 묘한 여유가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 내려서 단 하룻저녁을 보내고 베를린행 기차를 탔다. 초록빛의 들판과 상아색, 고동색의 주택이 어지럽게 섞이는 배경을 옆에 끼고 네 시간을 달려 겨우 베를린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이곳을 좋아하게 되리라는 것을 쉽게 직감했다. 너무 따뜻하지도 너무 차갑지도, 너무 깨끗하거나 더럽지 않은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베를린에서의 첫 날, 점심으로 속이 다 시원해지는 쌀국수를 들이켜듯 먹고 마우어파크로 향했다. 희끄무레한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울창한 이름 모를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커다란 공원이었다. 일요일에 열리는 벼룩시장엔 오래된 LP부터 작은 촛대까지 안 파는 것이 없어 보였고, 눈길을 잡아끄는 퀄리티의 예쁜 액세서리 가게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것이어서 조금 웃음이 났다. 팔리는 액세서리 하나하나의 모양을 빠르게 스케치해서 장부를 적는 한국인 사장님께 실버 귀걸이 하나를 사고선 왼편에서 벌어지고 있던 독일인 청년의 버스킹을 구경했다. 제목을 알 수는 없는 곡이었지만 훌륭한 목소리였다.


‘마우어파크노래 자랑’ 현장


   돗자리를 깔거나 깔지 않고도 한낮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 보니 저 멀리서 사람들의 굉장한 함성이 들렸다. 누구 유명한 가수가 와서 공연이라도 하나 싶어 가보니 동그란 노천극장 같은 데서 진행자가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불러 무대에 세우고 있었다. 런던에서 온 여자가 근사한 노래를 불렀다 내려간 무대에 스페인에서 온 하비에르 아저씨가 올라왔다. 하비에르 아저씨는 “Johnny B. Goode”을 불렀는데 그는 “쟈니 비 굿”이라는 부분 외의 가사는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아저씨의 노래는 오로지 “흥엥엥엥흥응엥엥”의 반복으로 채워졌지만 아무도 아저씨의 노래를 비난하지 않았다. 왼쪽에 앉은 금발 여자분은 ’댄스는 기세다’를 몸소 보여주는 아저씨의 춤사위를 찍고 있고, 오른쪽에서는 수염이 가득 난 이슬람계 아저씨가 맥주병 한 짝을 들고 맥주 판매에 나서고 있었다. 흥응엥엥이 다시 한번 난무하는 그 동그란, 흙먼지가 나부끼는 흙바닥 무대를 내려다보며 문득 말할 수 없는 가뿐한 행복이 들어차는 걸 느꼈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도, 우산을 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였다.


   《굿플레이스》라는 드라마가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후반부까지 천국에 가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은 천국에 당도해 무한한 행복과 시간을 누리게 되지만, 천국에 영원히 머물러 있으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한하지 않은 행복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고, 줄어들지 않는 시간 속에선 귀중한 순간이라는 게 생기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어서다. 일요일의 마우어파크에서 하비에르 아저씨의 엉망진창인 노래와 말도 안 되는 춤을 보며 깔깔거리며 웃으면서 내가 느낀 감상도 그랬다. 회사에 가면서 감정적으로 구르고 지치는 이백 며칠의 워킹데이가 있기에 이 일주일 남짓 베를린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름답고 귀하게 느껴지는 거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출근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게 있을까 싶어지는 날들이 대부분이지만, 또 “출근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나를 상상하는 것조차 소름 끼치게 느껴지지만 어쩌면 나는 이미 출근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업무적인 일상과 퇴근 후의 시간을 사랑함으로써. 거지 같은 회의가 진득하게 펼쳐지는 직장 생활을 일주일간 벗어나는 데서 오는 행복은 출근하지 않는 내게선 발생하지 않을 테니.


   지금은 그저 레게 음악이 울려 퍼지는 호텔 라운지에 허리를 조지는 자세로 앉아 가만히 생각해볼 뿐이다. 어느 끔찍한 회의가 길게도 진행되고 있을 이십몇 층의 회의실에서 떠올릴 오늘 이 순간을. 하비에르 아저씨의 흥응엥엥거림과 아저씨의 재롱을 아무도 비웃지 않던 일요일 낮 마우어파크 군중의 따뜻함 같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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