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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Oct 22. 2023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

   “그” 입사 10주년 기념 파티에 입장하기 전 나는 숨을 크게 골랐다. 나는 I형 인간의 전형으로서, 굳이 따지자면 I형 인간 중 E에 근접한 성향이라고는 하나 그런 내게도 E형 인간들이 80% 이상으로 추정되는 모임에 들어가는 것이란 어떤 면에선 링 위에 질질 끌려가는 실력 없는 권투 선수가 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에서는 통상 한 사업부에 같은 연도에 입사한 동기들을 ‘입사 동기’라고 일컫는데, 그는 사업부가 워낙 많기도 하고, 한 사업부만 해도 웬만한 회사 하나의 규모에 버금가기 때문에 그렇다. 다른 사업부에도 같은 해에 입사한 동기들이 분명 있지만 이들을 알 수 있는 기회는 그룹 연수와 계열사 연수 단 두 번뿐이라 입사 후엔 마주칠 일이 드물다. 이쯤 해서 내가 어떤 사업부로 배정되었는지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아주 커다란 우리 회사에서 ‘사업부’란, 담당하는 제품군과 분야의 차이이자 통장의 명암을 가르는 기준이다. 제품군과 분야가 통장의 명암을 가른다는 건 다시 말해 잘 나가는 사업부에서 발생한 이익은 그 사업부로 귀속된다는 뜻이며 콩 한 쪽을 전 사업부가 균등하게 쪼개 나눠 먹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입사한 사업부는 우리 회사에서 매출이 발생하는 품목을 모두 커버하는 곳이었으므로 다른 곳과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한 회사의 모든 영역을 커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려면 전사 전략을 수립하는 곳이거나, 전사 경비를 좌지우지하는 곳이거나, 또는 내가 입사했던 사업부처럼 영업조직이면 된다.


   입사하고 보니 우리 사업부 동기들은 다소 특별했다. 신입사원 연수 중 수시로 주어지는 발표 과제를 위해 무대에서 마이크를 쥔 사람들이 번번이 우리 사업부 소속으로 밝혀지면서 나는 영업조직인 이 사업부를 관통하는 어떤 DNA가 있음을 자연스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말을 잘하고, 때론 소리도 잘 지르는 어떤 울림통 같은 것. 춤을 시키면 곧잘 추는 흥 같은 그런 것들…….


   바로 그들이 입사 기념 파티를 위해 빌린 그 파티룸 안에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부터 나는 호수에 대한 정보 없이 그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저 가장 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면 되는 일이었다. 참석자는 한 열세 명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서른세 명이 한데서 목청껏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잘못됐어…… 나는 눈 앞 5센티로 다가온 현실을 부정하며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문 앞에서는 커다랗고 하얀 비닐봉지가 외롭게 치킨 두세 마리를 껴안고 있었다. 배달이 왔으면 초인종을 분명 눌렀을 텐데, 이거 안 갖고 들어가고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돌아갈까,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나는 용기를 내어 문을 열어 그 소음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40분 남짓 늦은 것 같은데 이미 2차까지 와버린 듯한 취기가 파티룸을 메운 뒤였다. 벌게진 얼굴들 사이로 나는 머쓱하게 인사를 건네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몇 해 전 사업부를 바꿀 기회를 얻어낸 뒤 원 사업부에서 지역적으로나 업무적으로 한참 멀어진 나로서는 입사 이후에 처음 만나는 동기도 있는 어려운 자리였다. 조금 아는 사이가 아주 모르는 사이보다 어렵다는 것을 초 단위로 실감했다. 견디기 어려운 실감이었다.


   앉은 자리 옆엔 오늘 나의 참석을 응원해 준 동기 오빠가 있었다. B 오빠(이 오빠의 실명과 단 1도 관계가 없다)라고 하겠다. 이 모임의 청일점. 순간 데시벨이 몇백까지 치솟는지 모를 이 자리에서 유일한 남성인 B 오빠도 꽤나 대단한 결심을 하고 이곳에 들어왔을 터였다. 피곤해 보이는 오빠의 눈동자를 뒤로 하고 수다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도 큰 사운드가 쉴 새 없이 오가고, 음악이 틀어졌고, 술을 마시고도 안무는 까먹지 않는 용한 기억력의 동기들이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며 춤을 춰댔다. 자꾸 나에게도 춤을 추라고 했다. 나는 너희들처럼 춤을 못 춰 얘들아…….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은 반가웠지만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몇 년간 잊고 있던 나에게 그들의 에너지는 감당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B 오빠는 사진 찍을 때는 조용히 할 수 있지 않냐면서 너네 대졸 맞냐면서 소리를 질렀다. 몇 잔 술을 마시고, 잠시 벽에 기대앉아 광란의 인간화를 관조하던 오빠와 나는 10시를 넘겨 찾아온 일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티룸에서 빠져나왔다.


   아주 친하지는 않지만 나는 B 오빠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이 오빠는 나처럼 밈에 절어 있는 오빠고, 언변이 뛰어나고 똑똑한 사람이었고, 상사가 수지를 5%만 닮았어도 50%쯤이나 닮은 것처럼 칭찬할 줄 아는 센스도 있는, 무엇보다 입이 무거워야 하는 인사 업무를 하면서 정말 입을 무겁게 할 줄 아는 직원이었다. B 오빠는 파티룸을 빠져나와 조금 덜 습하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쐬자마자 놀랍게 정돈된 눈빛으로 돌아왔다. 다 논 게 아니구나, 일부러 조금 덜 놀았구나. 저 오빠도 노는 거 재밌어할 텐데. 왜 더 놀지 않았냐고 묻자 오빠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저기서 풀어지고 거기서 실수라도 하잖아? 우리끼리만 덮어준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야, 그거 어떻게든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 조심해야지, 같이 일할 사람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며 강남대로를 걸었다. 오빠는 남들은 퇴사를 하고 2년은 꼬박 매달려야 겨우 따는 자격증을 휴직 비스무리한 걸 꼴랑 몇 개월 하면서 딴 대단한 일꾼이면서 동시에 남들과 똑같이 연애했다 헤어지고 결혼을 생각해 보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둑해진 금요일 밤, 거리에 쏟아지는 조명을 비껴가며 서로를 지나간 사람들 흉도 조금 보고, 회사도 조금 욕해봤다. 지금은 떨어진 곳에서 일하고 있지만 서로 똑같이 지니고 시작한 공통 분모 때문인지 오빠는 나의 욕을 정확히 알아들어주었다. 나 역시도 오빠가 하는 욕을 웬만한 사람들 이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떤 불가피한 일에 부딪힌 내 하소연을 듣던 오빠가 나보고 지금 당장 바꿀 수 없는 건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기라면서 그런 소리를 했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 그게 내 회사생활 신조거든.”


   그 말을 듣자 조금 머물러 있던 술기운이 가시는 소리가 났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 나는 그 문장을 옮기는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되뇌며 걸었다.


   오빠가 가진 자격증을 갖고 개업한 친구들은 월에 천오백 이천씩 번다는 얘기도 들었다. 오빠도 개업하지, 왜. 잘할 것 같은데. 내 대답은 사회생활도 뭣도 아니고 진심이었으나 오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일하면서 보니까, 위로 올라가서 내리는 작고 사소한 결정들이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파급력 있는 결정이 이뤄진다는 걸 아니까, 그걸 하려고 기다리는 거야.”


   여기까지 데려다줬으면 됐어, 오빠도 얼른 들어가. 아냐, 멀리서 왔는데 버스정류장까진 가줄 수 있지. 입사 동기간의 작고 다정한 실랑이를 하며 오빠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내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돌아가는 버스에선 B 오빠가 그동안 직장인으로서 지나 보냈을 시간을 잠시 생각했다. 자신의 일을 잘 지키려고 그동안 참았을 술자리와, 거나하게 취하고 싶은 날 멈춰야 했던 발걸음 같은 것들. 일을 망치지 않기 위해 못내 삼켰을 어떤 사람에 대한 호감과 불쾌함 같은 것들을. 대들고 싶어도 이 악물고 참았을 어떤 분노와, 숨긴 티도 내지 않고 숨겼을 부조리에 대한 괴로움을. 더 큰 결정을 하게 될 날을 위해 숨을 골랐을 낮과 밤들을.


   물 수 있을 때까지 이를 갈고 짖지도 않고 숨죽이는 건 어떤 걸까. 아무 계획도 작정도 없이 회사에 다니는 나로서는 다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저렇게 작정을 하고 버티는 건 나의 사소하고 조악한 고민에 비해 무척 멋이 있구나. B 오빠의 언변과 서글서글한 웃음 같은 것으론 차마 다 버무릴 수 없는, 잘 벼려진 칼날이겠구나. 저걸로 언젠가 저 오빠가 적확한 한 획을 그었으면, 또는 필요한 곳을 찔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으로부터 또 십 년이 걸리든, 이십 년이 걸리든 그걸 응원해줄 자신만은 내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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