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돌이켜보면 나의 입사는 조그만 행운들이 열두 개쯤은 모여 탄생한 엄청난 기적이었다. 내가 하늘에 가까운 학벌(a.k.a. SKY)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특히나 내가 다녔던 학교는 소규모여서 별달리 밀어주고 끌어주고 할 선배들이 없었던 것이 첫째 이유였다. 둘째로 나는 4.5 만점 기준 4가 될 듯 말 듯 한 학점의 소유자로서 대학 생활도 그다지 성실하게 해낸 편이 아니었으며, 셋째로 취준 생활의 전부를 나의 본가인 대전, 즉 지방에서 했기에 취직에 유리한 온갖 정보들로부터 KTX 1시간만큼 떨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실로 추정되는 풍문에 의하면 내가 입사했던 해의 직전 해에, 수십 명의 부장급 직원들이 퇴사처리 되는 일이 생기면서 입사할 신입 사원의 규모가 역대급으로 컸다고 한다.
이쯤 해서 내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한 가지 고마운 점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바로 이 취직 때문인데, 내가 취직하던 2013년에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지방 인재’ 육성 정책에 따라 대기업들에서 지방 인재를 위한 T/O를 할당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회사는 기본적으로 서류를 결격 사유만 필터링하듯 느슨하게 보는 회사로 유명했는데, 특히 그 해의 서류 전형과 인적성 검사에는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하던 그 제도도 약간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막상 더 심하게 고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난 지금은 별로 이야깃거리도 아닌 고생 같지만, 내가 취직하던 해의 나는 딱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가진 게 많지 않은 상태로 취준이라는 과정을 반기 동안 버티자니 몸엔 슬슬 병이 나기 시작했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말이 더 이상 비유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살이 빠졌고, 피부가 전부 뒤집어졌으며, 소화불량과 각종 악몽에 시달렸다. 가끔은 이대로 나가서 죽으면 그래도 불쌍하게 죽은 취준생으로 기억되기라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베개를 베고 눈물을 흘린 날은 너무 많아서 며칠이었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
앞서 말한 전 정부와 갖가지 행운들의 결합이 불러일으킨 결과였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개고생을 하던 나는 별안간 지금 우리 회사의 면접 전형을 준비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 면접까지 남겨진 시간은 고작 열흘 정도뿐이었고, 나는 취준생들이 모인 카페에서 스터디원을 구해서 본가인 대전에서 매일매일 스터디 모임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대전에서 서울까지 매일 오가는 길은 물론 힘들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나의 면접 준비 과정은 대부분 순탄했고, 나름 실전에 강한 나의 성향상 떨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내게 가졌던 믿음의 마지막 불씨였다고 해야 할까. 언제든 바람이 불면 꺼져버릴 수 있지만 불이 붙어있는 동안엔 분명 작은 그 지점만은 빛내고 있는.
면접 전날 이별을 통보했던 남자친구(지금은 이 사람이 남편이 된 것이 약 소름 포인트) 덕분에 각성을 제대로 하고 면접장에 들어갔던 나는 잔 실수 없이 면접을 마쳤고, 몇 주 뒤엔 그렇게 기다리던 합격 통보를 받았다. 화면에 뜬 합격 페이지를 뒤로 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합격 사실을 알리다가 몇 글자를 뱉지도 못한 채 오열도 했었네. 10년을 꼬박 지나 보낸 지금 돌이켜 보면- 얘야, 그건 단지 단 한 번의 꿀물 드링킹 같은 순간이었단다. 그 시작 뒤로 얼마나 많은 파란이 몰려올지도 모르고……. 너는 가깝게 생각하던 상사에게 성추행도 당하게 되고, 네가 어울리고 싶어하지 않았던 아저씨들 앞에서 수십 번은 굽신거려야 할 거고, 너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수에게 은근하지만 명백한 따돌림을 당하기도 할 거란다……. 다른 이가 원하던 것을 운 좋게 얻었다는 이유로 친하게 지내던 동료와의 관계가 심각하게 틀어지기도 하고, 업무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별안간 삶에 대한 훈수를 두는 놀라운 후배를 만나기도 할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거지 같은 일을 많이 겪는다고 해서 쉽게 회사를 관두지도 못할 거란다. 너는 빚을 몇억씩 지게 될 거거든.
지난 토요일은 정확하게 내가 회사에 들어온 지 10주년이 되는 날이었으나 워킹 데이(‘영업일’에 준하는 개념, 공휴일이 아닌 일하는 날을 말한다)가 아니었던 탓에 하루 전인 금요일에 챗봇이 내게 메시지를 하나 보내왔다. 조잡한 하늘색 배경에, 멋없는 맑은 고딕 폰트로 쓰인 ‘입사 10주년을 축하합니다’라는 이미지를.
글쎄, 그건 정말 축하할 일일까? 난 어떻게든 버텼을 뿐이고 딱 한 번의 진급 외엔 이룬 것도 마땅히 없는데. 회사를 사랑하지도, 일을 사랑하지도, 동료를 사랑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토요일 저녁부터 지나갈 일요일이 애닳아 못 견디겠는데 말이지. 아니다, 까짓것, 축하한다는데 축하할 일이라고 치지 뭐. 1초 만에 메신저 창을 닫으면서 공연히 나오던 헛웃음을 뒤로 하고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웃기게도 동기가 준비한 입사 10주년 기념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별 대단한 의미를 찾지 못할 일이라며 스스로 그 의미를 깎아내리면서도 막상 축하하는 자리를 지나치기엔 서운했던지도. 10년 전, 합격 통보 페이지를 뒤로한 채 전화기를 붙들고 오열하던 그날의 내게 적어도 그 정도 축하와 낭만은 남겨주고 싶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