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하나뿐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의 엄마다. 내 인생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두 분의 할머니가 주어졌으나 아빠와 엄마가 오래 전 갈라선 뒤 아빠의 엄마는 만나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므로, 내겐 정말 단 하나뿐인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금요일 자정이 다 되어 돌아가셨다. 토요일 아침에는 열두 시까지 늘어지게 자는 것을 내 일생의 큰 주특기로 생각하고 살았는데, 지난 토요일에는 어쩐지 다섯 시에 눈이 떠졌다. 습관처럼 일어나자마자 확인한 카톡엔 너무 건조해서 버석하게 갈라질 것 같은 톤으로 엄마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금요일 자정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내일모레 발인이니 직장에 알릴 거 알리고 내려오라고.
직장에 알릴 것……. 우리 회사에서는 통상 이런 일을 알려야 할 사람이 부서에 한 명씩 당번처럼 지정이 되어 있었다. 그 당번에겐 갖은 허드렛일, 누가 하든 귀찮은 일들이 과업으로 주어지는데 물론 그건 그분의 올해 과업이긴 하지만 이런 일을 알리기에 토요일 아침은 너무 죄송한 시간이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원격근무 시스템에 접속해 경조사 관련 각종 규정을 뒤졌다. 외조모상에는 경조비, 근조화환, 장례용품과 더불어 3일간의 경조사 휴가가 주어진다. 경조사 휴가는 발생 즉시 사용. 이 휴가는 분할하여 사용할 수 없고, 별도의 증빙 서류도 필요하지 않음……. 발생 즉시라는 말은 오늘부터를 말하는 것인가? 익명 게시판을 뒤져보니 워킹데이 기준 3일이었다. 발인일이 일요일이었으니 결국 나는 모든 장례를 치르고 월요일부터 사흘 동안 출퇴근에서 면제된다는 뜻이었다. 오, 나의 할머니시여…….
서둘러 장례식장에 보낼 장례용품을 신청하기 위해 시스템에 접속했다. 할머니의 이름을 쓰고, 경조 내용을 입력하고, 최대한 빠른 배송을 부탁드린다고 적었다.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장례용품을 기다리고 있어서였다. 장례식장에서는 일단 박스를 뜯는 행위가 과금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는데, 각 손녀 손자의 회사에서 오게 될 장례용품들로 필요한 수량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면 굳이 장례식장에서 장례용품 박스를 뜯지 않아도 되기에, 어떻게든 점심식사 시간이 도래하기 전에 용품 배송이 되는 게 급선무였다. 시스템에서 조회되는 장례용품 업체에 전화해서 되도록 빠르게 보내주실 수 있는지 재차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이제 그 ‘당번’님께 부고를 알릴 차례였다. 공지를 하는 것만큼은 당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외조모상 정보 드립니다’로 시작하는 메시지를 빠르게 작성했다. 고인 누구누구, 장례식장 어디 어디, 발인일 언제 등등의 정보와 내 연락처, 또 아무도 올 수 없는 장소와 시간대였으므로 조의 계좌 정보도 적었다. 마지막으로는 청탁금지법 비대상이라는 내용을 함께 적어 당번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에서는 부고를 알릴 때 통용되는 어떤 템플릿이 있었다. 까만 특수문자와 표 등을 활용해 검은 픽셀 리본을 가로로 한 줄 세로로 한 줄 둘러주고, 그 안에 망자와 망일, 장례식장 등의 정보만 조금씩 짜깁기되는 식으로 그룹사 수많은 사람들의 부고 공지를 담당하는. 토요일 아침임에도 당번님은 빠르게 양식을 작성해 비밀참조로 전 팀원에게 부고를 알려주셨다. 업무 메일을 확인하지 않을 주말임을 감안해 단체 메신저 방에도 공지해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곧 카톡으로도 당번님의 부고 메시지가 도착했다. 안읽음 숫자가 점점 줄어들면서 각기 다른 부서원들에게서 보내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메시지가 연이어 올라왔다. 이제 직장과 연결되어 내가 장례식장에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 알게 된 뒤 다섯 시간만의 일이었다.
할머니가 금요일에 돌아가셨으므로 실질적으로 가족들이 장례식장에서 보낼 시간은 토요일 하루가 전부였다. 어른들은 너무 아침부터 무리해서 내려와 봐야 일만 하고 정신없을 거라고, 느지막한 오후에나 내려올 것을 권했다. 우리 집 식구들 말고도 다른 집 사촌들도 그쯤에나 모일 거라고.
그리하여 온 가족이 장례식장에 모인 건 토요일 오후 네 시 반쯤이었다. 장례식장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스크린엔 할머니가 생전에 찍은 사진이 좌측 한 편을 차지하고 있었고, 벽엔 각종 회사와 단체에서 온 화환들이 둘려 있었다. 우리 회사에서 보낸 화환은 빈소 입구와 가까운 쪽 벽면에 서 있었다.
장례식장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의연했던 나는- 빈소에 놓인 할머니 영정 사진과 할아버지와 약혼할 때 찍었다던 흑백 사진을 포함해 젊고 예쁠 때부터 문자 그대로 ‘쪼글쪼글 할머니’가 될 때까지의 시간이 담긴 사진 일곱 장을 바라보다 펑펑 울어버렸다. 내가 우니까 가만히 조카를 데리고 서 있던 언니 눈에도 덜컥 눈물이 고였고, 나무 같은 동생도 따라 울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고, 장례식장 안에 있던 직원분들이 잽싸게 상을 날라 주셨으나 애매하게 휴게소에서 허기를 뒤늦게 때우고 온 터라 별다른 식욕이 없었던 나는 수육 몇 점과 이천 쌀로 빚었다는 인절미만 두어 조각만 집어 먹었다. 이천 쌀은 과연 맛이 있었다. 쫀득한 인절미를 우적우적 씹으며 장례식장 안을 둘러보았다. 우리 회사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힌 장례용품 박스들이 서넛 보이고, 또 옆에는 아마 이모부가 배송시켰을 거래처 은행 중앙회에서 온 박스들, 또 옆에는 취직한 지 3년이 된 이종사촌이 다니는 제약회사에서 온 박스들, 또 옆에는 고모부네 회사에서 온 박스들이 연이어 놓여 있었다. 우리 회사 측에서 보낸 장례용품은 늦어도 한 시가 되기 전에 올 거라고 했었는데, 다행히 12시 전에 도착해 엄마의 시름을 덜어주었다고 했다.
모르는 것도 권력이라더니, 참으로 그랬다. 회사에 입사한 이후 나는 장례용품 업체를 몰라도 되었고, 어떤 용품을 챙겨 보내야 하는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고, 그 용품들의 값을 치르려면 얼마를 내야 하는지 알지 못해도 괜찮았다. 회사를 떠나는 순간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도맡아 알아보고 챙겨야 할 일들이었다.
사실상 하루뿐이었던 장례식장에서의 하루는 손님들을 맞고, 인사를 나누고, 할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돌림노래처럼 설명하는 엄마와 이모를 바라보는 사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 사이 하늘 올려다보기를 참 좋아하는 손녀를 위해 할머니가 선물해주신 것 같은 미치도록 아름다운 노을도 보고, 상실의 슬픔이라는 게 아직 뭔지 잘 모르는 여덟 살짜리 조카의 재롱에 모두 까르르 웃으며 잠시 할머니의 부재를 잊기도 했다. 장녀로서 모든 슬픔을 꾹 눌러 담은 채 분주히 현장을 지휘하던 엄마는- 이튿날 화장터에서 할머니 입관 절차를 시작하자마자 둑이 무너지듯 슬픔을 쏟아내며 나무 같은 동생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가루가 돼서 돌아온 할머니를 유골함에 담은 엄마와 삼촌과 이모들은 장지로 떠났다가 돌아와 온 가족이 함께 점심을 먹었다. 모든 식구들은 장례식장에 다시 모였고, 정산하고 남은 비용은 조의금을 받은 비율대로 순탄하게 나눠 가졌다. 운전하느라 고생한 차주들에게도 조금씩의 거마비가 주어졌다. 할머니의 장례 일정은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일요일 저녁, 장례식장이 있던 충북 음성에서 출발해 세 시간 만에 올라와 서울 집에 짐을 풀고 기절하듯 누워서 할머니를 잠시 생각했다. 상실의 슬픔은 해갈되는 형태가 아니라 면역력이 떨어진 몸에 감기 기운이 도졌을 때 기침하듯 발현되는 것이기에 할머니가 떠난 자리는 언제건 크고 작은 슬픔으로 발견될 것이었다. 장례식장에서 하루, 발인 장소에서 출발해 보낸 하루까지 고작 이틀이 전부였던 여정은 쓰레기 같은 체력을 가진 내 몸에 엄청난 부하를 주었는지 할머니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눈꺼풀이 천근만근처럼 내려왔다. 내일은 할머니 덕분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월요일이었다. 이런 일에 덕분이라는 말을 쓰는 건 너무 불효손녀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모를 것이었다. 내가 매일 아침 감당해야 하는 거지같은 일간 진척 회의가 있다는 걸. 그 회의에서 사흘이나 공식적으로 면제된다는 게 내게 얼마나 큰 다행인지에 대해서. 화요일도, 수요일도 출근하지 않는 주간이 내 심신에 얼마나 이로운지에 대해서. 할머니 출근 안 하게 해줘서 진짜 고마워요, 보고 싶어요, 그리고 생전에 더 많이 찾아뵙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요……. 마지막으로 눈꺼풀이 내려오기 전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하늘나라에서 나의 인자한 할머니는 분명 이런 사사로운 생각을 하다 잠드는 손녀도 굽어살펴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