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태백 살이]
글을 쓰겠다며 한글 파일을 열었지만 커서만 깜박일 뿐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문장을 쓰는 방법을 잊어버린 느낌이었다. 홍보 업무를 맡은 내게 주어진 첫 임무는 기고문 작성이었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게 아득한 옛 일인데, 갑자기 신문에 싣을 글을 적으라니 막막할 따름이었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게 언제였을까. 공무원 공부를 하는 기간 동안 일기를 비롯해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않았으니, 아마 기자 준비생 시절 쓴 글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땐 참 글을 많이도 썼다. 보통 일주일에 2편, 많으면 4편의 글을 썼다. 그렇게 한 편 한 편 써낸 글들은 3년 동안 차곡차곡 쌓였지만, 목표에 닿기엔 부족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글을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이 들 때쯤, 기자 준비생 생활을 청산하고 공시생 생활을 택했다.
퇴근 후 책장에서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과 박완서의 수필집을 꺼내 들었다. 한 때 자주 필사했던 추억의 책들이다. 글쓰기가 막막할 때면 대가들의 글을 찾았다. 정성껏 조리된 음식을 맛보듯이 한줄한줄 음미했다. 그러다 보면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이 만나며 만들어내는 리듬감이 조금이나마 손에 잡히는 느낌이었다. 필사를 하는 동안 그때 생각이 났다. 몇 년 전과 마찬가지로 촉이 얇은 펜으로 문장을 공책에 옮겨 적었다. 한 글자라도 놓칠까 집중하는 손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갔다.
다음날 출근 후 다시 기고문을 작성했다. 손이 욱신거리도록 필사한 어젯의 시간 덕분인지 글이 금방 써졌다. 내 안에 숨어있던, 타임워치로 1시간을 재며 글 한편을 써내던 기자 준비생 시절의 저력을 발휘하며 글을 완성했다. 언론사 이메일로 기고문을 투고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수신 확인을 했다. 글을 보내도 언론사에서 실어주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다는 얘기가 있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메일 수신 확인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신문 기고문란에 내 글이 실렸다. 내 이름 석자를 달고 쓴 글이 드디어 신문에 실린 것이다. 오랜 꿈과 겹쳐보이며 뒷맛이 쓰기도 하고 달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며 세운 기준은 두 가지였다. 첫째 사회를 위한 일을 할 것, 둘째 글을 쓸 것. 두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직업이 기자라 생각해 긴 시간을 투자해 글을 쓰며 도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 걷지도 못할 길을 헛되이 닦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고 돌아온 출발지에는 20대 중반의 내가 청춘의 열정으로 닦아놓은 길이 놓여 있었다. 헛되이 닦았다고 생각했던 그 길을 덕분에 그래도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무사히 뗄 수 있었다.
이후 맡게 된 일 역시 크고 작은 글쓰기의 연속이었다. 강원도 지역 라디오 방송국들과 계약을 맺어 공익 목적의 퀴즈를 연재하고, 관공서 전광판과 홈페이지에 공익 문구와 배너를 띄웠다. 글쓰기라 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짧은 글이지만 독자에게 무슨 메시지를 어떤 표현으로 전달할지 고민해야 했다. "이렇게 재밌는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다니!"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겁게 일했다.
원하는 일만 계속할 수 없는 까닭에 지금은 홍보가 아닌 다른 업무를 맡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공직자로서 사회를 위해 일하고 있고 퇴근 후엔 글을 쓴다. 대학 졸업 후 꿈꿨던 두 가지 목표를 어느 정도는 실현하며 사는 셈이다. 사람은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원하는 삶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서툴게나마 그 모습을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