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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Cumi Aug 20. 2020

슬픔이 없는 애도

애도하는 사람이 알려준 기억법

정확히 1년 되었다. 규백이 깊은 잠 속으로 떠난 것이. 막내딸인 그녀는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서 병원으로 달려가는 택시 안에서도 죽음의 냄새를 맡지 못했다. 전에도 위기를 넘기고 소생했던 날들을 생각하면서.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이미 규백의 몸은 하얀 천으로 덮여져 있었다. 불과 몇 분전의 일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곡성이... 비현실적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 거짓말 같은 현실은 드라마 같았다. 


‘이게 진정 끝인가?’ 

‘이게 죽음인가? ’ 


이 순간은 규백이 항상 기도하던 성모송의 구절, 

“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를 외쳐야 할 순간임에도, 그 누구도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 


규백의 남편과 딸들은 폭우처럼 울었다. 함께 간 막내 사위는 차분하게 장모님의 모습을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담았다. 고통에서 해방된 해탈한 여승같은 얼굴이었다.


죽음의 수습은 급박하게 이뤄졌다. 갑작스런 상이지만 가족들은 힘을 모아서 장례식장 예약 절차를 밟았다. 열심히 스마트폰을 이용하고, 서로 밥을 챙기고 눈물 보이기를 아꼈다. 어쩌면 가족들은 2년간 요양병원에서 꺼져가던 규백의 생명을 보면서 차곡차곡 마음의 준비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도의 변화에서도 알 수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규백의 완쾌를 위해 기도했다. 하지만 점점 엄마의 아픔을 덜어달라고, 병원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녀는 기적을 믿는 사람이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엄마가 고통 없이 살 수 있을 만큼이 평화롭게 결정된 진실 같았다. 


처음으로 유족의 옷을 입고 선 그녀는 문상을 온 사람들을 보는 자신의 시선이 낯설었다. ‘조문을 가다’에서 ‘조문을 받다’로 바뀐 방향이 어색하고 이상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유족’으로서의 태도이나 정체성 따위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또한 많은 문상객들의 모습도 어색하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녀보다 어린 친구들은 방금 전 인터넷에서 검색한 대로 문상예절을 수행하는 듯, 어설펐다. 순간순간 웃음도 났다.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서 어설프고 어색하고 이상하구나. 

베테랑이 될 때쯤이면 우린 어떤 모습일까? 


모두들 엄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얼마나 아팠고, 힘들었는지? 

엄마를 돌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 얼마나 슬픈지... 

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여러 번의 비슷한 질문들에 조금씩 다른 답변을 하면서 울었다. 자꾸만 고이는 눈물을 빼내는 일종의 절차 같았다. 규백이 죽음으로 가게 된 이야기는 5년 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시작했다. 


‘그러니까 5년 전이지... 

70대 초반까지만 엄만 나보다도 걸음이 빠를 정도로 건강했어

근데, 갑자기 넘어져서 팔이 부러지고, 또 요실금이 심해지고, 그러다 파킨슨 병 진단을 받고, 그래서 간병인도 매일 집에 왔거든. 

근데, 파킨슨 병의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는 거야. 알고 보니 소뇌 위축증이란 희귀병이라는 거야. 의사한테 그 얘기를 들은 다음 날 아침, 간병인이 가스 불 잠그러 주방에 잠깐 간 사이, 엄마가 넘어졌대. 그리고 청심환 먹더니 잤대.

너무 오래 자서. 아빠가 우릴 불렀는데. 그 후 응급실 가고. 뇌출혈이 왔다고 해서 중환자실 가고. 한 달 만에 깨어났는데, 

재활치료 잘 안되고, 혈압도 낮고. 기력이 달려서. 계속. 아파하고. 몸을 비비꼬면서 찡그리고.

기도 삽관한 상태라 말하지도 먹지도 못한 채 몸은 점점 말라가고. 진통제, 항생제 다 쓰면서. 폐렴 왔다가 다시 회복하고, 계속 그랬어. 그러다가. 지난 번엔 이겨내고 살아나셨는데. 이번엔.... 견디지 못하셨나봐 ...


그녀는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는 점점 나빠지는 구슬픈 이야기라는 걸 느꼈다. 두서없는 지난 이야기는 점점 구조를 갖추면서 익숙해져갈지언정, 돌이켜 보면 더 잘 치료할 수 있었을 거 같은, 조금이라도 잘 해드릴 수 있는 일들이 떠올라, 미치겠고 슬픈 후회, 미련, 자책들이 밀려왔다. 


‘엄마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잘못했어. 더 잘했어야 했는데.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데 그 말이 진짜 구나.

왜 이제 알았을까.





정확히 10년 되었다. 그녀가 ‘애도하는 사람’을 읽은 것이. 그녀가 진행하고 있는 독서 팟캐스트에 출연하기로 한 사서님이 추천한 도서였다. 공교롭게도 규백의 첫 번째 제사를 앞두고 있었다. 게스트가 추천한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이므로, 그녀는 그 두꺼운 책을 십 년만에 다시 들추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엄마를 애도하는 시간으로 생각하며 읽어야겠군. ” 


일본 작가 텐도 아라타가 쓴 애도하는 사람은 2008년 일본에서 출간된 화제작이다. 텐도 아라타는 이 작품으로 일본의 소설가에게 가장 영예로운 상인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에는 2010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고, 그 후 지금까지 ‘애도’ 에 관한 책으로, 단연 깊이 면에서 대표적이다. 


소설 속 애도하는 사람 ‘사카쓰기 시즈토’는 어린 시절 새끼 직박구리의 사고사부터, 할아버지의 돌연사, 절친한 친구의 병사까지 다양한 얼굴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마음의 병을 얻는다. 특히 절친을 잃은 상실감은 그에게 평범한 인생을 앗아갔다. 그는 죽은 자를 기억하지 않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전국을 쏘다니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망자들을 애도한다. 신문, 잡지에 실린 사건 기사나 부음 소식을 접하며 애도의 일정은 몇 년간 계속되는데... 


나쁘게 말하면 그는 죽음이란 불행을 쫓아다니는 이상한 방랑자, 노숙자, 청년거지 쯤일 게다. 특이한 점은 그의 애도의 대상은 선한 자이든 악한 자이든 차별하지 않고 모두 해당된다는 것인데, 죽음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악한 자이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받았고, 사랑을 했고, 감사하고 감사를 받았던 존재였음을 확신한다. 


551 쪽의 대화 


@ 애도의 대상 (죽은 영혼, 사쿠야)

“불합리한 죽음에 대한 분노와 애통함을 가슴에 새기는 편이 공양이 될 경우가 있지 않을까?”

 

@@ 애도하는 사람 (시즈토)

“살인사건이나 음주 교통사고를 접할 때는 감정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노와 원통함을 앞세우다보면 기억에 남는 것은 고인이 아닌, 사건이나 사고 혹은 범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면 죽은 아이의 이름보다 그 아이를 죽인 아이의 범인의 이름이 먼저 뇌리에 떠오르는 식으로요. 죽은 이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인생의 본질은 어떻게 죽었나가 아니라,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551p.  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권남희 역, 문학동네) 


그녀는 구절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다. 


“맞아. 죽은 자들 입장에서도 자신의 본질에 대해 기억해주길 바랄거야. 좋아했던 것들,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이야기들, 사람들과 마음을 나눴던 이야기들 말야. 


죽기 전에, 재수 없이 어떤 사고를 당해, 어떤 병에 걸려, 어떤 나쁜 일이 벌어져, 얼마나 고생하다 갔는지에 대한, 잔인한 죽음의 본질은 거론해봤자, 슬픔과 자책과 분노만 커질 뿐이야. ”


규백의 죽음 후, 그녀를 제일 괴롭힌 생각은 엄마가 아파할 때, 함께 오래도록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병원에 일주일에 한번 방문하면서, 점점 변해가는 엄마의 모습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그래서 피하고 싶은 광경들이었다. 

임플란트한 이빨과 나사들이 자꾸만 삐져나오는 이상한 현상들. 너무 두꺼워져 손톱깎이로 잘라지지 않는 손톱들, 발톱들, 진통제도 듣지 않는 고질적인 근육통으로 온 상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말을 하고 싶지만 목소리를 잃어버린 노인. 딸이 누군지 모르는 막막한 표정.

도대체가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엄마의 얼굴들. 

그렇게 점점 타인처럼 낯설어져 갔다. 서먹해져갔다.


그때 더욱 엄마 곁을 파고들었어야 했다. 시종일관 열심히 기적을 내놓으라고 하늘에 대고 당당히 기도했어야 했다. 마지막 날 밤은 정말 달려갔어야 했다. 혼자 마지막 숨을 외롭게 쉬고 떠나게 하다니...

엄마 입장에서 얼마나 속상하고 서운했을까? 괘씸했을까?


엄마 미안해. 내가 이기적이었어. 

그렇게 뒤늦게 울었다. 


하지만 애도하는 사람은 그런 괴로운 마음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엄마를 기리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죽음의 터널에서 고통 받았던 그 날들이 아닌, 살아생전 당신이 좋아했던 봄날들, 여름날들을 더 많이 기억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애도의 방식을 바꾸기로 마음먹는다.


이규백씨는 무엇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았나?

어떤 것들로 행복했고, 어떤 점들로 존경과 감사를 받고 살았는가?


보랏빛 꽃무릇처럼, 하야한 안개꽃처럼, 향기로운 라벤더처럼 

그렇게 엄마다운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을 모으면서 규백을 오래도록 기억하자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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