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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Jun 04. 2021

기억할 것은, 단 하나!

이 자리에서 여한없이 사랑할 것!


“박*옥 사장님이세요? 사업장이 집주소인데 여기서 영업이 가능한가요?”


“네, 저도 그게 궁금해서 오래 실험해봤는데 괜찮더라구요.”



월요일 아침 세무서에서 전화를 받았다. 담당공무원의 ‘사장님’ 호칭에 순간 움찔했다. 결혼식장에서 성혼서약을 하는 느낌이랄까. 충분한 연애를 거쳐, 그러니까 충분히 검토하고 또 검토하여 드디어 결혼을 결심했건만 막상 식장에서 성혼서약을 듣고 있자니 뭔가 무지하게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대론데 이 식장을 나가면 별안간 유부녀가 된다는 게 새삼스럽기만 했던 기억이 떠올랐던 거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 사업자등록증을 받았다. 홈택스에서 간편히 출력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세무서까지 가서 찾아오는 번거로움을 자청한 것은 이제 삶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알리는 의식이었다. 한참을 기다려 빨간 세무서장 직인이 찍힌 노란 종이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정말로 시작이구나!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15년을 근무하다 퇴직했다. 6년의 육아휴직기간을 고려하면 실제로 일을 한 기간은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딘가에 소속되어 주어진 일을 하면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공무원 정체성은 생각보다 뿌리 깊었다. 정확히 그래도 된다는 규정과 선례를 확인하지 않고는 섣불리 뭔가를 새로 벌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도 공무원 마인드의 한 일면일 것이다.



새로운 삶을 열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다양한 실험들을 하며 여기까지 오기는 했다. 가슴속 구상들을 현실로 옮겨내는 작업은 너무나 설레고 흥분되는 일이어서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그 모든 모색들은 어디까지나 ‘실험’이고 ‘연습’이었다. 기꺼이 정성을 다하지만 아니다 싶으면 그걸로 그만일 수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정말로 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들과 긴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토록 자유로웠던 연애를 졸업하고 ‘결혼’을 결심한 걸까? ‘나는 왜 결혼했을까?’ 결혼하고 수없이 묻고 답했던 질문이다. 결혼생활이 마냥 꽃길이기만 했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질문일 것이다. 기왕 했으니 어떻게든 살아는 보겠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결혼’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는 결연한 각오의 다른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왜 굳이 다시 ‘혼인신고’를 할 마음을 먹었을까?



그것은 아마 이제 그만 어딘가에 뿌리내리고 싶다는 열망일 것이다. 사랑의 단맛만 찾아다니던 방랑에서 쓴맛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날 수 있는 자유보다 함께 하기로 한 그 약속을 지켜내는 것이 더 큰 자유임을 눈치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함께하는 기쁨과 즐거움뿐만 아니라 노여움과 슬픔마저도 한 생명체로서의 온전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양분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회복해가는 수련이야말로 내가 이 별에 보내진 이유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야 내가 결혼을 선택했던 것이 실수가 아니라 운명이며, 축복이었음을 온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업 첫날밤을 보내고 사장님으로 맞는 첫 아침,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기쁨으로 사랑을 나누는 시간들이 쌓여가다 보면 아가야들 같은 생명의 열매들이 맺어지겠지. 때로는 나를 기쁘게 한 그 사랑으로 인해 죽을 만큼 힘들어 지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사랑으로 그 고비를 잘 넘겨갈 테고, ‘이렇게 살 수 있어 내 인생이 참 좋았네’ 흐뭇하게 미소 지을 날도 반드시 찾아오겠지. 그렇게 나는 나를 닮은 세상 속을 기쁘게 살아가게 될 거야.



기억할 것은, 단 하나! 이 자리에서 여한없이 사랑할 것! 충분히 탐험하고 스스로 선택해 비로소 싹을 띄워낸 바로 이 현장이 내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임을 잊지 않을 것! 공무원처럼 말고 ‘사장님’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선례를 스스로 만들어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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