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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Feb 07. 2022

그들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엇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우리들의 리듬


논에 심어둔 벼가 더디 자란다고 그 모가지를 잡아당기면
벼의 뿌리를 뽑거나 상하게 할 수 있다.
오랜 친구는 말 그대로 오래 묵은 친구다.
사귀는 동안 감미로운 맛이 배기도 하고,
부글부글 끓기도 하고,
삭기도 하면서 익는 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다.
여기에는 기다림과 그리움이 필요하다.

쓰다고 뱉고 달다고 삼키면 오래갈 수 없다.
이내 실망하고 다른 사람을 찾아가지만
또 똑같은 이유로 헤어지고 관계가 소원해지게 된다.
사람을 바꾸어가며 얕은 관계를 계속해 나가는 것은
패스트 푸드로 배를 채우는 것과 같다.
사랑 없는 섹스로는 영혼이 피폐해지듯,
얕은 관계만으로는 사람의 진정한 맛을 알 수 없다.

사귀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차이와 변덕과 조급함을 넘어
나를 참아내고 이윽고 다른 사람을 참아낼 수 있어야만
비로소 시간이 그 관계의 맛을 그윽하고 깊게 만들어준다.

- 구본형의 <세월이 젊음에게> 중에서

십 수년, 묵은 관계를

비우고 또 비워내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처음부터 어떤 의도를 세우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없는 언행은 가급적 하지 말자는

원칙을 세우고 나니

'의무와 책임'만으로 유지되던 관계들이

저절로 정리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연결되어있는 존재들의 공통점이 보입니다.

삶을 배움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리 말하면 지나간 인연들이

섭섭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그들이 배움을 포기했다는 의미로도

들릴 수 있으니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일단 태어난 아이가

다시 자궁으로 돌아갈 수 없듯

한번 그런 지향을 갖게 된 존재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운 법이니까요.


제가 먼저 떠나오기도,

또 저를 떠나가기도 했던 인연들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분명한 우리가

더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참을 이 질문과 씨름하다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아

질문을 바꾸어 보았니다.  


나는 왜 그들을 떠나올 수 밖에 없었는가?


다른 존재의 속내를 가늠할 깜냥이 되지 않으니,

스스로에게 물어 답을 찾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랜 탐문의 결과 얻은 답은, 리듬이었습니다.

목적지가 같아도 속도와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빠르면 힘에 부쳤고,

너무 느리면 속이 터졌습니다.

나의 리듬대로 살고 싶어 시작한

모험의 여정이었으니,

 함께 하기 위해 제 리듬을

흐트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저를 위해 타인의 리듬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구요.

그때마다 저는 거리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보호하려고 했고,

이를 단절의 선언으로 받아들인 상대와는

더이상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회복해낸 저의 리듬을

상대방을 이해시키느라 깨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 외롭고도 충만한 시간의 선물일까요?

아직은 아주 가끔이지만

한때는 불편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타인의 리듬을 즐기고 있는 저를 만납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과정에서 치루게 되는 엇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우리들의 리듬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한 번 그 맛을 보고 나니

서로의 고유한 리듬이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물론 리듬을 맞춰가는 과정에서의

엇박은 여전히 저를 부대끼게 합니다.

이러지 않고도 잘만 살았는데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고생을 사서하나.

하는 습관적인 후렴구가 어김없이 흘러나오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제 깊은 곳의 누구보다 지혜로운 그녀가

의미없는 엇박을 허락할 리가 없다는 것을요.

그 아름다운 존재가

최선의 최선을 거듭한 선택의 결과로

맞이하고 있는 엇박이라면

기꺼이 치루어낼 의미가 있다는 것을요.


이렇게 깊어져가다보면

삶은 또 얼마나 더 맛있어질까요?

같은 방향을 향해 춤추듯 함께 가는 우리는

얼마나 더 서로를 사랑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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