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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Apr 15. 2024

어른들의 끈적한 스트레스

매운맛으로만 씻어 내릴 수 있는 으른의 스트레스.

이게 없을 땐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은 발명품들이 몇 개 있다. 예를 들어 내비게이션 젓가락 시계 따위가 있다. 

나에게는 불닭볶음면이 그러하다. 불닭볶음면 없을 땐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면서 살았을까.


한국인들 사이엔 '스트레스를 받을 땐 매운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마치 '음식이 싱거울 땐 소금을 뿌려야 한다'는 당연한 공식처럼, '스트레스 이꼬르 매운 음식'이 보편화되었다. 


나 또한 20대 중반부터 매운 음식을 찾기 시작했다. 내 몸뚱아리 하나 스스로 먹여 살려야 하는 어른의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비수를 꽂는 말로 후벼 파진 자존감 
기대와 실망의 연속인 인간관계
돈 벌어먹기로 인한 스트레스
빌어먹을 불안과 초조함


10대 때 스트레스가 수용성이었다면, 20대 성인이 받는 스트레스는 끈적~한 지용성에 가깝다. 퐁퐁으로 열심히 비벼야 지워지는 기름때처럼, 어른의 스트레스는 노력을 해야 지워진다.  


"매운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데.. 먹어볼까?"

가난한 사회 초년생은 한 봉에 1,400원짜리 불닭볶음면으로 매운맛의 세계에 입문했다. 



마라탕 엽기 떡볶이 매운 갈비...

각양각색의 매운 음식이 존재하지만 그중 제일은 불닭볶음면이라고 본다. 라면 한 봉지로 스트레스를 씻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정도였다.


"사장님 여기 고추 추가요~"

매운맛은 중독적이었다. 

언젠가부터 식당에 가서 청양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추는 반찬 수 채우려는 데코레이션인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다. 순댓국집에 가서는 주문과 동시에 청양고추 추가를 요청한다. 국물에 잘게 자른 고추를 넣어 시원하고 맵쌀한 맛을 즐긴다. 그럼 마치 여름 볕 아래에 녹아버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이마부터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매운맛에는 입맛을 돋우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왜 아저씨들이 고추를 들고 질겅질겅 씹었는지 알게 됐달까.






그러던 어느 날, 매운맛은 나를 배신했다. 

여느 날처럼 평일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불닭볶음면을 1.5개 먹었는데, 다음날부터 바늘로 위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시작됐다. 위염이었다. 당장 병원으로 달려갔고, 친절한 남의사 선생님은 '앞으로 맵고 자극적인 음식과 밀가루를 피하세요^^'라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무시무시한 조언을 했다. 


스트레스를 풀어준다는 매운맛이 사실은 병을 키우고 있었다. 매콤한 배신 이후 '매운 음식은 스트레스를 풀어준다'는 공식에 감히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일명 매운맛 음모론자. 


위장에 부담스런 매운맛이 스트레스를 없애줄 리 없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다. 위염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첫째, 스트레스받지 않아야 하고 둘째, 맵고 자극적인 음식 먹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인들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다. 전후 관계가 좀 이상하게 정립된 것이다. 



그렇다면 

(스트레스) + (매운맛) 공식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네이버 뉴스에 '매운'과 '스트레스'를 키워드로 넣어 기사를 검색해 봤다. 그리고 오래된 기사 순으로 정렬시켜 보았다. 1990년대 기사부터 훑다 보니 2004년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불황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자극적인 맛으로 해결하려는 트렌드가 외식업계를 강타했다'는 내용이었다.


매일경제-불황에 매운맛 음식 뜬다
(2004.10.10)

낙지볶음 매운 갈비찜 고추장불갈비 불닭 등 매운맛을 내세운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불황 속에서도 선전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불황으로 인한 각종 스트레스를 자극적인 음식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짙어지는 세 태를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건국 신화에 마늘이 언급될 정도로 본래 맵고 자극적인 음식에 환장하는 한국인이지만, 스트레스와 매운맛을 연결 짓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된 일인 것이다! 


어쩌면 스트레스를 받고 매운 음식을 먹는 건, 스트레스로 인해 외부 자극에 둔감해진 몸에 매운 음식을 연료처럼 들이부어 다시 예민한 상태로 돌아가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궁극적으로 몸을 망치는 일종의 자학이다. 자학하는 방식으로만 스트레스가 풀린다면, 그땐 '과연 이게 내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의 스트레스인가'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불닭볶음면을 끊은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요즘엔 스트레스를 받으면 헬스장에 가서 천국의 계단을 탄다. 멈추지 않고 계단을 오르는 운동기구인데, 불닭과 효과가 꽤 비슷하다. 5분 만에 심박수가 170까지 올라가고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내가 느끼는 스트레스의 근원이 무엇일까'  곰곰이 떠올리며 지근지근 밟아버린다. 그리고 한걸음에 하나씩 버린다. 버리기 무섭게 차오르는 스트레스지만, 그렇기 때문에 매일 분리수거하듯 버려주면 좋다.




{이솔 올림}

서울에서 돈 벌어 혼자 사는 20대의 주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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