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영화 소공녀 중-
집이 없어 친구 집을 전전하며 지내는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집'만 없는 것일 뿐, 좋아하는 위스키와 담배,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말이다.
멋진 (소)공녀와 나 사이에는, 집이 없다는 공통점과 취향이 없다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취향은 유명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했던 것처럼 거창한 건 아니다.
“자고로 취향이란 것은,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징이라네”
-피에르 부르디외-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취향은 피에르씨가 정의한 의미보다는, 주관이 부재하다는 말에 가깝다. 소주를 시킬 때나 봄옷을 살 때와 같은 일상적 순간에서 부딪히는 선택의 순간. ‘아, 이거면 딱 좋겠다!’처럼 기준이 되어주는 취향이 부재하다는 말이다.
취향[趣向]
‘뜻 최’ 자에 ‘향할 향 ’ 자다.
쉽게 말해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이란다.
내 마음의 조타기를 쥔 선장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 상관도 안 하나 보다.
거의 모든 것이 다 괜찮다. 나쁘지 않다.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외적 스타일이랄 것도 없고,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 취향이나 브랜드도 그닥 없다.
그저 가격 대비 좋은 걸 취하면 기분이 좋다. 70% 할인으로 건진 메리노울 니트, 팔천 원에 깐풍기까지 나오는 한식 뷔페, 삼천오백 원짜리 하이볼. 가격 대비 맛 좋은 것들이 나를 기분 좋게 한다. 참 단순하게 사는 인간이다.
이렇다 보니 취향을 기반으로 선택하는 친구들을 보면 신기하다.
"나는 소주는 진로만 먹어. 제일 맛있던데?"
"저 옷 내가 환장하는 스타일이네."
"곱창 먹을 땐 볶음밥 말고 주먹밥을 먹어야 해."
“난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소설 좋아해.”
"그래! 난 다 좋아. 네 맘대로 시켜~"
쿨하게 말하지만 속으로 생각한다.
‘오… 개 멋있다..’
별거 아닌 사소한 것에도 취향이 확실할수록 멋있다. 한편으로 상대적 박탈감과 비슷한 맛의 감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릴 때 뭔가를 선택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인가'라는 생각이 얼핏 스치기 때문이다. 빠듯한 형편에 휴대폰은 늘 공짜폰, 옷은 엄마가 사다 주는 것, 외식보단 집밥 Oriented Girl.
하지만 어쩌면 이 생각은 너무 비관적인 상상의 나래고, 단순히 불만이 있어도 입 꾹 닫던 착한 아이여서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면 그냥 무지하게 무던한 인간일 지도.
무색무취 인간이라는 건 나의 콤플렉스였다. 취향이 없다는 건 재미없는 인간이란 말처럼 들린다. 어떤 제안에도 다 좋다고 하는 뻔하고 취향 없는 사람.
내가 취향 있는 사람이 부럽다며 툴툴대자, 동갑내기 친구 다영이는 이런 말을 했다.
"
나도 그게 고민이었는데,
우리 팀장님이
취향이 있다는 건
선입견이 있는 걸로도 볼 수 있대
위로해 주기 위한 아무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말의 울림은 생각보다 깊었다. 취향이 부재하다는 벽에 부딪힐 때마다 내면 속에서 떠올랐다.
’어쩌면 나,
취향이 없는 게 아니라 선입견이 없는 걸지도.‘
취향이 없으니 오히려 새로운 경험을 더 많이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 스타일을 한정 짓지 않으니 다양한 옷을 입을 수 있고, 음식에 취향이 없으니 늘 새로운 걸 먹어볼 수 있고, 여러 장르의 책을 전전하다가 인생 책을 만날 수도 있겠다.
인생은 역시, 양면 색종이 같다.
{이솔 올림}
일상 속 영감을 수집하는 주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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