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이빨 왜 이렇게 노래졌어?"
동생의 악의 없는 질문에 잠시 넋이 나갔다.
‘어..? 무슨 말이야 언니 이가 왜 노래져…’
황급히 거울을 봤다. 살짝 베이지색이긴 한데…
‘애당초 내 이가 하옜나?’
이빨탈슈붕게가 온다. 인정하긴 싫지만 옐로우 톤이 조금 올라왔다. 몇몇 용의자들이 떠오른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맥주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마셨던 제로 콜라, 회사 점심시간에 매일 같이 마셨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크런키 초콜릿이 코팅된 빼빼로...
아무래도 빈도나 음용양을 고려해 보았을 때 커피가 가장 유력한 범인 같다.
커피를 마시는 상황은 ‘음미하며 마실 때’와 ‘살기 위해 마실 때’로 나뉜다. 전자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취향에 맞는 커피를 음미하며 마시는 상황이고, 후자는 카페인 섭취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마시는 상황이다.
슬프게도 우리나라 커피 시장은 생산성을 높이는 쪽에 포커싱 되어 있다. 한 블록 사이를 두고 마주한 저가 카페들만 봐도 그렇다. 단돈 천오백 원에 적당한 맛과 카페인을 섭취할 수 있는 저가커피는 대부분 각성하기 위한 포션쯤으로 구매할 것이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마시는 커피는 맛이고 뭐고 카페인만 들어 있으면 장땡이다.
심지어 아이스면 더 좋다. 더 빠르고 손쉬운 섭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하면서 노룩(No look) 드링킹도 가능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아이스아메리카노에 환장한다. 한 기사는 그 까닭을 한국인의 커피 음용 상황 때문으로 보았다. 한국인들이 대부분 쉬는 시간, 식사 시간 등 제한된 시간에 빠르게 커피를 마심으로써 각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최초로 에스프레소머신을 개발했다는 커피 종주국 이탈리아인들에게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달라고 했다가는 얼음 두어 개 넣은 미지근한 커피를 맛보게 된다고 한다. 그만큼 아. 아. 는 한국에서 요상하리만치 발전된 문화다.
나에게 식후땡 커피가 습관이 된 것은 회사에 다니면서부터다. 점심 식대가 제공되니, 꾸역꾸역 내 돈 주고 안 마셨을 식후땡 커피를 마신다. 처음엔 밀크티나 카페모카 같은 달달한 메뉴를 고르기도 했지만, 매일 마시다 보니 결국 칼로리도 낮고 맛도 적당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선택하게 되었다.
난 커피 맛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따뜻한 커피를 마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회사 점심시간에서 HOT은 사치다. 팀분들 이야기에 리액션하는 막내의 기동성을 생각하면 아이스가 제격이다.
상항이 이렇다 보니, 평일의 커피는 맛있어서 먹는 경우가 드물다.
한국사람이 평일에만 커피를 생산성을 높이는 수단으로 마시냐, 그건 또 아니다.
평일 커피에게 가장 중요한 게 '카페인'이라면, 주말에 마시는 커피에게 중요한 건 ‘콘센트'이다. 노트북을 충전시킬 콘센트가 또 한 번 커피 맛을 앞선다.
주말에 놀기만 하는 한국 직장인을 찾긴 어렵다. 블로그 포스팅이라든지, 영상 편집이라든지, 밀린 공부라든지, 독서라든지, 부동산 스터디라든지. 주말에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이들로 스타벅스는 늘 시끌하다.
나 또한 슬프게도 주말까지 생산성 강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주말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면 불안하다. 적어도 노트북 앞에 앉아 있기라도 해야 주말이 가치 있게 느껴진다. 그래서 기를 쓰고 카페를 찾는다.
콘센트를 꽂아도 눈치 보이지 않는 동네 카페에 앉아서 아이스아메리카노 혹은 달고나라테를 빨대로 쪼옵 빨며 노트북에 집중한다.
어느 날 한 세계 여행자의 글을 읽었다. 한국에서와 달리 콘센트 유무와 상관없이 오직 뷰와 커피 맛만으로 카페를 골랐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콘센트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가 참 멋져 보였다.
카페를 선택하는 기준이 오로지 커피 맛인 삶을 살고 싶다. 카페에서 커피만 마시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내면을 갖고 싶다. 생산성에 미쳐 한잔 커피의 여유마저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요즘 생산성을 위한 커피 섭취를 줄이고 있다. 대신 누룽지차나 보리차처럼 구수한 차를 우려낸 다음 얼음을 잔뜩 넣어 마신다. 뇌에게 이 보리차가 아이스커피라고 속이면서 생산성을 올린다.
앞으로 커피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상황에만 마시기로 했다. 생산성을 높이려고 마시는 커피든, 음미하며 마시는 커피든, 이빨은 누레지겠지만. 이왕 누레질 거면 음미는 하고 누레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Ps. 최근 가장 인상 깊었던 커피 음미의 순간을 소개하겠다.
첫 번째 커피, 어머니가 커피빈 인스턴트커피로 내려주신 커피. 카누랑 다를 바가 없는 알커피인데 왜 이렇게 구수하고 맛이 좋을까. 나무 식탁에 앉아 가족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커피는 금방 바닥이다.
두 번째 커피, 을지로의 에스프레소 바에서 마셨던 콘파냐와 카페봉봉. 카를로와 둘이서 에스프레소바 두 곳을 돌았다.
콘파냐는 에스프레소 위에 크림치즈만큼 꾸덕한 휘핑크림을 올린 메뉴이다, 크림이 차갑다 보니 따뜻한 에스프레소와 마치 아포가토 마냥 어우러지는 게 맛이 좋았다.
이날은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에스프레소 2잔과 티라미수까지 해치웠다.
그날밤 잠 들지 못했다. 티라미수에도 커피 샷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 커피, 가족들이 내가 자취하는 동네에 놀러 왔을 때 마셨던 커피와 롤케이크. 음미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는 꼭 따뜻한 음료를 시킨다. 커피 한입에 식도를 따고 내려가는 따뜻함을 느끼며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여유가 참 좋다.
인터넷 상에서 스타벅스 광인으로 불렸던 사람. 폰도, 태블릿도, 노트북도 없이 커피만 마시던 남자.
어쩌면 이 사람 아주 멋진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상 속
영감을 수집하는 주간 에세이
{이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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