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얼굴
그 마음을 아무리 상상해 봐도 끝내 모를 일이다.
강원도 고성으로 조금 이르지만 아주 멋진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고성은 속초나 강릉보다 멀지만, 사람이 적고 숙소도 저렴하며 맑은 바다에 손만 넣으면 너무나 쉽게 조개(!)를 잡을 수 있다. 게다가 중화 비빔밥을 기가 막히게 하는 중국집까지 있어, 요 근래 3년간 가장 자주 찾은 피서지라 할 수 있다.
7월 첫째 주에 찾은 고성은 여름이라 하기 무색할 정도로 시원했다. 서울보다 북한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닭살 돋은 팔뚝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한적함을 찾아 송지호나 아야진 해변이 아닌 공현진 해수욕장에 갔다. 하지만 막상 가니 물놀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뒷걸음질 쳤다. 적당한 한적함은 좋지만 미지의 세계인 바다에서 적막 수준의 한적함은 두렵다. 그래서 네임드 해수욕장인 송지호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고성의 바다는 내가 본 가장 맑은 바다인 제주 우도 수준으로 맑았다. 그 덕에 스노클링 명소로도 유명한데, 이번에 큰맘 먹고 스노클링 장비를 장만해 왔다.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색이었는데 옵션 중 가격이 가장 저렴해 어쩔 수 없이 골랐다. 그런데 바다에서 보니 어디서든 눈에 띄는 쨍한 색이 은근히 맘에 들었다. 얼굴에 잠수경을 구겨 넣으니 코와 눈이 압축하듯 조여왔다. 입으로 숨을 쉬며, 마우스피스를 입에 딱 맞게 꼈다.
바닷물은 얼음장 같았다. 들어가지 말까 고민하다가 딱 한 번 눈 감고 몸을 던지니 또 금방 적응되었다. 심지어 미지근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또 한 번 큰 결심을 하고 야심 차게 바닷물에 얼굴을 담갔다. 연노란색의 모래들과 흩날리는 미역을 봤다. 물고기를 보려면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 했는데, 1분 정도 헤엄치다가 그냥 장비를 벗어버렸다.
고개만 들면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인데, 이상하게도 바다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스노클링 대신 소금쟁이처럼 팔다리로 유유히 떠다니며 인간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아이들과 물놀이를 나온 부모들이 8할이었다.
어쩜 저리 닮은 얼굴들을 하고 있을까.
이마트에서 어린이날 바비인형을 파는 판촉 아르바이트를 한 적 있는데, 아이 손을 잡고 장 보러 온 사람들을 보며 ‘사람들은 정말 자기랑 쏙 닮은 것들을 데리고 다닌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송지호도 마찬가지였다. 얼굴과 걸음걸이까지 닮아 있었다.
저마다 무언가에 심취해서 놀고 있는 아이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오늘을 기억하려나.
나의 어릴 적엔 1년에 한두 번 계곡에 가는 게 여름휴가의 전부였다. 내비게이션이나 맛집이나 숙소 정보를 알려주는 앱도 없었던 시절. 여행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늘 생업에 매달려 있던 나의 부모에게는 그 정도 여유를 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산을 좋아하는 아빠를 둔 덕에 우리 가족은 늘 강원도 계곡에 갔다. 계곡은 햇살에 해수면 온도가 올라 따끈해지는 바다와 달리, 큰 나뭇가지들로 자연 그늘막이 쳐져 정오에도 서늘했고 물은 말할 것도 없이 차가웠다. 유속이 세다 보니 튜브를 타고 둥둥 떠다니는 여유는 무슨 바위 미끄럼틀을 타며 과격하게 놀았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얼음장 같은 물에 들어가기 위해 심호흡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던 순간이 기억난다.
잔잔한 파도에서 서핑 강습을 받는 양 갈래 꼬마
물에 발만 담근 채 모래놀이를 하는 소년
아직 말도 못 하는데 엄마아빠가 맘대로 요란한 조개 모양 튜브에 넣고 떠다니는 아기
센 척하며 해수욕장의 경계 끝까지 수영하는 소녀
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늙진 않았지만 몹시 지쳐 보였다.
아이를 낳으면 먹이고 입히고 재울 뿐 아니라, 철마다 맞는 장소에 데려가 놀아주기까지 해야 하는구나…….
얼마 전 팀장님과 담소를 나누다가 아이가 최소 7살이 되기 전까지는 매일 같이 씻겨 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언젠가 자식을 낳게 된다면 딸을 낳고 싶었지만, 목욕시킬 걸 생각하면 아들이 낫겠다 싶다. 아이 아빠 될 사람이 담당하게 될 테니 말이다. (만 5세부터는 이성 부모와의 목욕이 지양된다) 아직 말도 못 하는 갓난쟁이를 먹이고 트림시키고 재우고 제철 과일 사다 먹이고, 봄이면 벚꽃 축제 여름이면 해수욕장 가을엔 단풍 구경 겨울엔 산천어 축제. 매주 주말엔 아쿠아리움, 동물원, 미술관, 키즈카페 ……. 지금은 그저 노는 날일 뿐인 어린이날 크리스마스도 그냥 넘길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보니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이제는 아이보다는 부모에게 감정 이입된다. 아이를 갖게 되면 나만의 시간은 0에 수렴하겠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가, 또 동시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기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에 또 덜컥 겁이 났다. 나의 엄마 명희는 내 나이 때 벌써 피둥피둥한 5살, 6살 연년생 자매를 최소한 한글은 알아들을 정도로 키워 놓았을 텐데 말이다.
해수욕장에 서서 아직 머리카락도 별로 없는 아기가 앉은 튜브를 살살 흔드는 엄마를 보며 막연히 부러운 맘이 들다가 다시 아득함이 몰려왔다.
아이를 데리고 고성에 놀러 온 엄마 솔을 상상해 봤다. 3시간 반 운전으로 피곤해 반쯤 감긴 눈으로 아이가 만든 모래성을 보며 영혼 없는 리액션을 하고 있다. 머릿속엔 '누워서 단편소설집이나 읽었으면' 하는 생각만 가득하다. 아이가 모래 파기에 열중한 사이 책을 펼쳐 읽으려는 순간, 소매를 걷어달라며 아들 같기도 하면서 딸 같기도 한 아이가 다가온다. 흘러내리지 않게 소매를 올려준 다음 이제 진짜 첫 페이지를 넘기려는데 갑자기 우는 소리가 들린다. 모래에 바닷물이 들어왔다며 아이가 울고 있다…….
아무래도 나는 아직 아이를 갖기엔 이기적인 것 같다.
나보다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쉽게 자라지 않는다.
그 마음을 아무리 상상해 봐도 끝내 모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