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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편

내가 아주 나쁜 연쇄 강아지 학대범일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지.

by 이솔

본래 나는 강아지파였다. (사실 그 어떤 동물보다 인간 편인 주제에, 강아지파 고양이파 나누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아무튼 언제나 강경한 강아지파였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요즘 들어 고양이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아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지금 길 고양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은 죄다 ‘도둑고양이’였다. 냥줍 같은 단어는 아예 없었다. 고양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라곤 투니버스에서 여름마다 방영하던 <학교괴담> 속 기분 나쁜 검은 고양이나, 눈에 영혼이라곤 1그램도 담겨있지 않은 헬로키티가 전부였다. 고양이를 좋아하기엔 왠지 찜찜한 맘이 드는 시대를 살았다.


언젠가부터 한국엔 고양이 붐이 불었고, 언제나처럼 줏대 없는 나는 또 강아지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하게 됐다.


얼마 전 나의 고양이 선호에 쐐기를 박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고성에서 무척 귀여운 강아지를 만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바닷가 근처 허름한 집 앞마당에 조그마한 개가 한 마리 있었다. 셰퍼드처럼 생겼으나 너무 어려서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아기였다. 어릴 때 개한테 물린 적이 있으면서도 개를 무서워할 줄 모르는 나는 성큼 다가갔다.

언덕진 길이라, 강아지가 있는 마당과 내가 선 도로 사이 높이가 꽤 차이 났다. 검고 작은 강아지는 저 멀리서부터 전력으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나의 쓰다듬을, 나의 손 냄새를 한 번이라도 더 받겠다며 열심히 점프 해댔다.

그 열렬한 사랑에 호응하기 위해 부지런히 터럭을 쓰다듬어 주다가, 문득 ‘저렇게 점프하면 허리에 안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더 예뻐해 주고 싶은 마음을 접고 뒷걸음질 쳤다. 알게 된 지 일 초 만에 무아지경으로 좋아해 주는 댕댕이.

맞아, 강아지의 사랑은 이런 모양이었지. 관심을 주는 즉시 도망가는 고양이와는 정반대였다.


‘얘는 날 언제 봤다고 이렇게 좋아하지? 내가 아주 나쁜 연쇄 강아지 학대범일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지. 요즘같이 흉흉한 세상에 이렇게 사람을 믿어도 되는 거야, 댕댕씨?’

나무 뒤에 서 있는 나를 또 귀신같이 찾아내어, 혀를 내민 채 ‘나 너 좋아!!!’를 온몸으로 외치는 강아지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열광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 아닌데, 가슴이 콕콕 쑤셨다.


고양이의 사랑은 조건이 있다. 자기가 내킬 때만 허락되는 사랑.

강아지의 사랑은 조건이 없다. 그냥 좋아하고, 그냥 사랑한다.


이 고성 강아지의 사랑이 나는 조금 불쌍했고 또 많이 슬펐다.


어릴 땐 강아지처럼 누구든 가리지 않고 다가갔다. 상대가 물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다 그만 다리를 물려버렸다. 강아지가 얼마나 험상궃든 상관없이 쓰다듬던 아이는, 이제 다치기 싫어서 사랑을 피하는 어른이 되었다.


고성 강아지 앞에서 나는 작아졌다.







(2025年 8月 2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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