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폰에는 2,172개의 메모가 쌓여있다.
일곱 시까지 회사 일을 하다가 퇴근하면 사부작사부작 글을 쓴다. 작가라는 감투는 없지만, 늘 무얼 쓰면 좋을지 궁리하고 이것저것 끄적인다.
비주얼 콘텐츠가 판치는 세상에서 활자를 택한 이유는 사실 어릴 때부터 수줍은 작가 지망생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적 성향이 있었던 나의 부모는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커서 작가가 되어라”하고 미리 점지해 주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동생에게도 화가가 되라고 말한 걸 보면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한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 시기 부모의 영향력은 지대해서 나는 그때부터 작가를 꿈꾸게 되었다.
처음 내 소유의 밤색 책상 의자 세트가 생겼을 때, 나는 책상 밑에 들어가서 외숙모가 선물해 준 그리스 로마신화 만화책 읽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걸 다 읽으면 엄마의 책장에 꽂힌 책을 닥치는 대로 훔쳐 읽었다. 스스로 로알드 달의 마틸다라도 된 듯했다.
마침 밖에서 노는 것도 안 좋아하고 친구도 없던 터라 학교에서도 도서관에 자주 갔다. 거기서 지독하게 편식적인 독서를 했다. 제목이 흥미로운 책을 한 권 꺼내 엄지손가락으로 내용을 훑다가, 음식을 먹는 장면이 나오면 당장 그 책을 대여했다. 먹고사는 이야기를 좋아했던 건 이때부터인 것 같다.
그러다 인터넷 소설 유행이 불었고, 도서관 대신 mp3의 깨알만한 스크린을 통해 인소를 읽기 시작했다. 엄마 몰래 읽다가 눈물 흘린 적도 많았다. 그러다 실제로 연재까지 했더랬다. 혼자 스프링 노트 한 권에 글을 쓴 다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반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제목은 심오했다. “사랑은 셀프에다 리필도 안 된다”
나의 입봉작이었다.
대학 생활로 멀어졌던 책과 다시 가까워진 것은 취업 준비생 시절이었다. 자기소개서를 준비하기 위해 스타벅스를 다녔는데, 불투명한 미래에 초조해지며 점점 집에 고립되기 시작했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매일 집 근처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엔 나이가 많든 적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자소서와 면접과 관련된 책을 한 무더기 가져와서 읽다가, 지루해지면 소설책을 가져와 읽었다.
직장인이자 자취생이 된 지금은 전자책을 즐겨본다. 확실히 종이책만큼의 감동은 없지만 부담 없이 여러 권을 빌려 더 잘 읽히는 책을 읽으면 되니, 독서량 자체가 많아져서 좋다. 그러다 정말 좋은 책은 소장하기 위해 구매한다.
책이 좋으면 읽으면 되지 나는 왜 계속 쓰고자 하는가. 글쓰기는 피를 맑게 해주는 미나리처럼 엄청난 효능을 가진다. 나름 n 년 차 방구석 작가로 살아보면서 체감한 글쓰기의 세 가지 효능을 소개해 보겠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익명의 누군가가 글쓰기에 영업된다면 좋겠다.
첫째, 완벽하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MBTI에서 N을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 펜을 드는 대신 '글 쓰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는 걸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이미 머릿속에 ‘어떤 내용의 글을 쓸지’까지 상상해 놓았지만, 정작 실천이 안 된다.
나 또한 극 N으로서 누워서 핸드폰을 보면서도 뇌의 30%는 글 쓰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어떤 깨달음 하나가 현실 글쓰기를 가능하게 해줬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직장인 A씨와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회사 다니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나중에 더 완벽한 타이밍에 창작하는 게 낫지 않을까?'
굳이 지금 창작을 해야 하느냐는 현재성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이런 결론을 냈다.
“똥을 쌀 거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싸자.”
우린 어차피 셰익스피어나 알베르 카뮈 같은 걸작을 만들 수 없다. 지금 창작하든 10년 뒤에 창작하든 어차피 똥 같은 걸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니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똥을 만든다면, 나이 들었을 땐 조금이라도 더 나은 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논리였다.
이날의 대화 이후 다소 지저분하지만 강렬한 한 음절 단어가 내 머리를 관통했다.
만약 내가 쓴 글이 실패한다 해도, 최악의 결론이라 해봤자, '나 말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작품이 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한 기록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꽤 괜찮은 거래 아닌가.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 큰 손해다.
둘째, 머릿속 생각을 정리해 준다.
내 아이폰에는 2,172개의 메모가 쌓여있다. 자랑이 아니다.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다.
아이폰을 쓰기 시작했던 2015년 때부터 쌓아온 메모니까 10년 치 메모인 셈이다. 내가 적는 메모 중 80% 이상은 과거 이야기다. 살아가다가 문득 떠오른 옛 기억을 기록한 것이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아무리 긴 낚싯줄을 던져도 옛날이야기만 딸려 올라왔다. 키보드에 손을 얹으면 내 손가락은 과거만 짚어댔다. 생산적이고 미래적인 글을 써보려 해도 키보드 앞에 서기만 하면 옛 시절 이야기만 술술 나왔다.
나는 왜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를 사는가. 심지어 아직도 종종 옛날이야기를 쓴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적고 싶었던 옛날이야기를 다 적으면 그땐 새로운 얘길 적을 거라 생각한다. 오히려 내 안에 옛이야기가 다 동나도록 바가지를 더 열심히 퍼댄다면 분명 새로운 생각이 들어올 틈이 생길 거다.
셋째, 나 자신을 보호해 준다.
루나파크님의 강연을 들으러 가서 에세이의 효능을 배웠다. 바로 "성찰과 자존"이다. 에세이는 남이 봐주든 말든, 자신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성찰의 기능을 하고, 또 창작자로서의 자의식을 만들어 주어 자존감까지 챙겨준다는 것이었다.
동감한다.
글쓰기는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바닥에서 허우적대던 나의 자존을 살려주었다. 꿈꿔왔던 광고회사에 들어갔는데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나름 인턴을 여러 번 하고 입사한 것인데, 아주 작은 부분까지 고쳐야 했다. 매일 자책의 구렁텅이를 헤매었다.
그때 나를 살리기 위해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심장이 새끼 손톱만해졌어도 글 쓸 때만큼은 주먹만해졌다. 회사에서는 지적받는 처지지만, 내 글 안에서는 모두 내 맘대로였다. 회사에서 나의 존재가 작아지더라도, 나의 세계가 있으니 마음의 보호막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나 자신이 싫어질 때도, 핸드폰에 울리는 댓글 알림을 보며 나를 살리는 다른 세상이 있음에 감사했다.
글은 나를 지켜주었다.
그러니까 실로 글쓰기는 건강에 좋다. 특히 거친 세상에 쉬이 상처받는 이들에게 특히 효과가 좋다. 완전하지 않아 더 의미 있는 글을 꼭 모두 써보시길 영업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