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하나 라벨을 붙여가며 사랑할 이유를 더한다
내가 아주 은밀하게 숭배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에니어그램이다. MBTI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양식을 설명하는 도구라면, 에니어그램은 행동 이면에 감춰진 내면의 동기를 설명한다.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가’를 설명하는 언어라고 볼 수 있다. 에니어그램은 인간을 아홉 개 유형으로 나눈다. 1번부터 9번까지 유형별로 각자 다른 욕망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 쉽게 풀어써보자면 이렇다.
1번 유형 원칙 주의자
자신이 ‘틀린 존재’가 될까 봐 두려워함. 그래서 도덕적 무결성을 중시하며, 자신과 타인을 내면의 원칙으로 검열함.
2번 유형 조력자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될까 봐 두려워함. 그래서 마치 참모처럼 자신의 욕구까지 희생해 가며 타인에게 헌신하고 도움을 주려고 함.
3번 유형 성취가
자신이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될까 봐 두려워함. 그래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내기 위해 끊임없이 화려한 성취로 자신을 포장하려고 함.
4번 유형 예술가
자신이 '평범한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함. 그래서 평범함을 혐오하며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함.
5번 유형 탐구자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상’을 두려워함. 그래서 자신의 내면을 깊이 바라보고 지식을 쌓음으로써, 세상과 자신 사이 튼튼한 벽을 쌓아 안전거리를 확보하고자 함.
6번 유형 충성가
자신이 ‘안전하지 않은 상태’가 될까 봐 두려워함.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위험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줄 조직, 권위, 신념을 찾아 헌신함.
7번 유형 열정가
자신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상태'에 갇히는 것에 대해 두려워함. 내면의 공허함이나 어두움을 바라보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새로운 재미와 쾌락을 추구하며 도망침.
8번 유형 도전가
자신이 '약한 존재'로 보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함. 그래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쥐고 힘으로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고자 함.
9번 유형 평화주의자
타인과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함. 그래서 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킬 바에 차라리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모든 것을 수용하며 평화를 지키고자 노력함.
에니어그램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그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이해하게 만들어주었다.
먼저 나 자신이다. 나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아이였다. 학교에서는 반에서 잘난 친구와 나를 비교 분석하며 공부할 동력을 얻었다. 내 앞에 붙는 타이틀을 중시했고, 수학여행보다 창업대회를 택했다. 스스로 절대 인정하지 않고 바깥의 인정만 바라지만, 막상 칭찬을 받으면 그 칭찬의 저의를 의심하는 나는, 나조차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3번 성취자 유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지금까지의 노력이 실은 대단한 무언가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무의미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필사적이 몸부림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건 다 사고, 다 먹고, 다 하고 싶어 하는 동생은 7번 유형이다. 동생은 3박 4일 일본 여행에서 무려 세 개 도시를 돌았다. 이보다 내 동생을 잘 설명하는 에피소드는 없다고 본다. 약간 초월한 듯 별달리 욕망하지 않는 엄마는 9번 유형인 것 같다. 엄마는 동생과 내가 캐주얼하게 다투기만 해도 질겁하며 싫어했는데 그 모습이 참 이해되지 않았다. 당사자들끼리 풀면 될 문제에 괜히 엄마가 껴서 더 큰일이 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가 평화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 이후로는, 싸우더라도 방문을 닫아놓고 조용히 싸운다. 늘 혼자 식탁에 앉아 맥주 피처를 마시며 철학 이야기를 하던 아빠는 5번 유형이었던 것 같다. 그는 딸들에게 “아빠 죽으면 어디 묻어줄 거냐”, “엄마가 왜 아빠랑 결혼한 줄 아냐”, “영화는 뭐라고 생각하냐” 같은 어려운 질문들을 던졌다. 재미없는 질문에 가족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혼자 남아 라디오를 들으며 앉아 있던 그의 모습은 내 눈에 참 외로워 보였는데. 어쩌면 그는 세상이 무서웠던 것 같다. 세상을 뒤로한 채 질문과 사색 속으로 숨어들었던 것 아닐까. 무언가를 책임지고 돌보는 행위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즐거워하고, 또 내가 아프면 바로 간병인이 되겠다고 말하는 카를로는 아마 6번 유형인 것 같다.
에니어그램에는 날개 개념이 있다. 예를 들어 3번 성취가 유형이면 2번이나 4번처럼 옆에 있는 숫자를 날개로 가지게 되는데, 날개에 또 사람이 확 달라진다. 3번에 2번 조력자 날개를 가졌다면, 에너지가 바깥을 향해 있어, 일만 잘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도 잘 챙긴다. '나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야'가 성공의 기준이다. 반면 3번에 4번 예술가 날개를 가졌다면, 에너지가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어 다소 차갑고 거만해 보일 수 있다. 대인 관계보다는 일 자체에 몰두하며 '나 이렇게 특별한 사람이야'가 성공의 목표가 된다.
더 멀리 가볼 수도 있다. 범죄 조직에 연루되어 실형을 살았던 모 연예인은 8번에 7번 날개였을 가능성이 높다. 힘을 중시하는 8번에 쾌락을 추구하는 7번 날개가 결합되었으니, 다양한 범죄를 저지르면서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내면의 욕망이 극단적으로 불건강하게 발현될 경우 그 끝이 범죄가 되기도 한다.(모든 유형이 그러하다.) 반대로 답답할 정도로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던 아이돌 막내 멤버는 1번 유형일 수 있다. 명절마다 주변을 살뜰히 챙기는 걸로 유명한 톱스타는 2번 유형일 수 있다.
이해되지 않던 주변 인물들에게 하나하나 라벨을 붙여가며 사랑할 이유를 더한다. 피하는 대신 조금 더 관대하게 조금 더 오래 바라본다. 저 사람은 대체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하고.
ps.
독자님들도 애니어그램의 세계로 영업해도 될까요.
https://enneagram-app.appspot.com/quest/
약식 검사 링크입니다.
여기서 검사하시고, 나오신 유형을 구글에 검색해보시면
나무위키에 자세한 성격 묘사가 나옵니다.
그걸 읽어보시고 더 나와 맞다! 하는 유형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어요.
어떤 유형이 나오실지 궁금한데요
제가 야매 유형 검사도 해드릴 수 있으니 댓글 주세요.(너무 사짜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