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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Oct 19. 2023

힙한 동네 성수에 대한 오해

3년 차 성수 자취생의 변

{EP18} 


힙한 동네 성수에 대한 오해


출처: Dalla Studio


내가 사는 동네 성수동은 유독 밈(Meme)이 많다. 표현은 다르지만 골자는 같다. 


힙(hip)함에 미쳐
기본적 예의도 없는 이들의 공간. 

밈에서 그려지는 성수동은 다음과 같다. 손님이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으면, 카페 직원은 합장을 하며 인스타그램 DM(디렉트 메시지)으로 정중하게 문의 부탁드린다고 대답한다. 직원만 이 모양이냐? 아니다. 인테리어도 환장이다. 업자에게 사기당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노출 콘크리트가 잔뜩이다. 성수는 이런 게 멋과 힙으로 여겨지는 곳으로 그려진다. 마치 클럽의 입뺀 문화처럼, 일정 수준 이하의 힙함을 지닌 일반인은 범접하기 힘든 결계가 있는 곳처럼 표현된다. 사람들은 이런 콘텐츠를 보고 '성수스럽다'라고 말하며 웃는다. 이처럼 성수는 '힙함에 미친 동네', '자아 도취된 힙쟁이들이 유난 떠는 동네'로 여겨진다. 


성수동 3년 차 주민인 필자는 이를 성수에 대한 철저한 오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유난스러운 부분도 없진 않겠지만, 그와 180도 반대되는 소박한 맛도 있다. 나도 성수동에 살기 전까진 큰 오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성수동과 살 부대끼며 살면서 어쩌면 진짜에 가까운 성수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한참 잘못 알고 있던 성수

2017년, 찐따 같은 나의 귀까지 성수가 힙하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경기도 본가에서 그나마 가까운 서울이었던 건대와 멀지 않았기에 바로 들러보았다. 성수에 대한 첫 느낌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동네'였다. 

성수에 대한 첫인상
: 핫하다는 브랜드들이 팝업 스토어를 신명 나게 오픈했다가 금방 종료하고,
분명 나는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인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딱 봐도 돈이 무지막지하 들어간 것 같은 대형카페가 즐비한 동네.
와중에 성수 특유의 힙한 바이브를 더해주는 오래된 카센터와 구두 공방이 마치 뽀빠이 과자 속 별사탕처럼 속속 박힌 동네.

외부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의 성수는 화려하게 그지없었다. 값비싼 식사와, 밥보다 비싼 커피를 파는 곳. 맛집 웨이팅 시간이 기본 30분이고, 아메리카노는 기본 오천 원인 무시무시한 동네. 노포 식당을 좋아하고 합리적인 가격을 사랑하는 나란 인간과 성수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와 다른 멋쟁이들이나 찾는 동네라고 취급하며 첫 방문 이후 4년간 단 한 번도 다시 찾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의 장난일까, 모종의 이끌림 덕분에 성수 주민이 되었고, 이런 고정관념을 깨트릴 기회를 얻게 되었다.




어쩌면 진짜 성수

월세 25만 원짜리 나의 작은 집은 성수 구길에 있다. 일명 성수 핫플이라고 불리는 연무장길과는 도보 1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연무장길의 팬시함과도 거리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성수는 성수구길의 모습에 가깝다. 세련된 성수가 가짜라는 건 아니지만, 구길쪽이 좀 더 오리지널리티가 있고 성수스럽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아래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

성수에선 사람 냄새가 난다

성수구길은 뭐랄까, 사람냄새가 난다. 아직 재개발이란 마수가 뻗치지 않아 예전 모습 그대로 오래되고 낮은 빌라들. 옛날 옛적에 유행했던 유행가 가사가 상호명인 맥줏집이 있을 정도로 20년 전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모습이다. 어렴풋 기억나는 엄마 손 잡고 걷던 거리 모습과 비슷해 노스탤지어가 느껴진달까.


성수, 의외로 살기도 좋기도 좋다. 이마트가 없어졌지만, 장보기 좋은 대형 식자재 마트가 두 개나 있고, 어쩌면 가장 중요할 다이소도 큼지막하게 있다. 나이 있으신 분들이 담소를 나누거나 가끔은 막걸리(..)를 드시는 작은 공원도 있다. 아침엔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졸린 아이들과 잠옷 바람의 엄마 아빠들이 재잘대고, 밤엔 일확천금을 노리는 아저씨들로 복권방이 넘실댄다. 


명색이 '구길'인 만큼 도로도 정말 좁다. 버스 하나가 다니기에도 좁기 때문에 버스 두 대가 도로에서 만나면 꼭 누군가는 양보해야 한다. 처음 이사 왔을 땐 그 모습이 마치 곡예 같기도 하고 몹시 위험해 보였다. 저러다 큰 사고 한번 나겠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3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 그들은 그 좁은 도로에 정통이 난 운전기사들이었던 것이다..!


성수엔 과거의 서울이 묻어있다

코끝에 겨울이 아른거리는 어느 가을날, 택시를 탔다가 성수동 주민이셨다는 기사님을 뵌 적 있다. 야근을 마친 터라 시트에 파묻힐 듯 푹 안겨있는데, 기사님이 갑자기 '서울숲 파출소 버스 정류소 앞에 있는 나무를 아냐'는 질문으로 말문을 여셨다. 다소 뜬금없었지만 아는 걸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터. 안다고 대답하자, 기사님은 아주 비밀스러운 정보를 알려주듯 소곤대며 '사실 오십 년 전에 그 나무는 아주 작은 묘목이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어찌 보면 50년 만에 묘목이 성목이 되었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일 보던 나무가 50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얕은 흥분에 휩싸였다. 살았던 시간대는 다르지만, 성수동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아저씨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내 반응이 좋자 아저씨는 성수에 얽힌 다른 옛날이야기보따리도 풀어주셨다. 오십 년 전에 성수동은 맨 상추밭, 시금치밭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공장이 많았는데, 아저씨는 특히 심신파스와 구론산 공장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둘 다 처음 듣는 브랜드라 이제는 없어졌나보다 생각했는데, 이날 이후로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쓰던 물파스가 심신파스였고, 마동석이 광고하는 자양강장제가 구론산이었다. 심신파스는 땅값이 오른 성수동을 벗어나 세종시에 공장을 차린 듯했다. 땅을 비싸게 팔고 나갔으려나 모르겠다. 아저씨는 성수에 샀던 아파트를 판 것을 후회한다고 하셨다.


아저씨가 어쩜 그렇게 성수동을 잘 기억하실까 궁금했는데, 이 뒤에 이야기를 듣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강변북로가 없던 시절, 한강 근처에 키만큼 자란 풀들이 수두루 빽빽이 었는데, 그곳은 젊은이들의 우범지역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뽀뽀도 하고 연애도 하고 그랬겠지. 그리고 아저씨는 애인과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나가 투명한 한강에서 빨래를 했다고 한다. 빨래 데이트라니. 별개 다 데이트다 싶지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빨래도 로맨틱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 부분은 정말 믿기 힘든데) 성수에서 배를 타고 봉은사로 넘어가 배밭에서 배를 따 먹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연애사업에 한창일 때 성수에서 사셨던 아저씨는, 당신의 청춘이 묻은 성수를 또렷이 기억하고 계셨다. 아저씨는 성수를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 청춘이 묻은 성수의 모습이 눈에 선하신 것 같았다. 왠지 나의 미래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 청춘을 성수에서 보내고 있으니까. 내가 쉰 살이 될 때까지 성수가 드문드문 지금의 모습을 남겨주길 바라본다. 


성수엔 자영업자들의 부지런함이 묻어 있다

성수엔 회사원들도 많지만, 개인적인 체감상 그보다 자영업자를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여기저기 상권이 워낙 활성화되어있기도 하고, 뚝도시장도 있다 보니, 장사하시는 분을 회사원보다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식자재 마트만 가도 카트 가득 재료를 싣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자영업자분들을 마주칠 수 있다.

쌍방울 가게 할머니는 40년 장사를 얼마 전 끝내셨다.

아마 성수에 시장이 있는지 몰랐던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나도 살게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크기는 작지만 만원 몇 장으로 밥배와 술배를 채울 수 있는 식당이 참 많다. 참고로 나는 시장 건물 위층 셋방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집을 나설 때마다 시장 한가운데를 지나치기 때문에 매일 상인들의 부지런함을 보며 경외감을 느낀다. 출퇴근이 자유로운 회사라 아홉 시 반까지 출근하는데, 아홉 시쯤 집을 나서면 시장은 이미 복닥거리고 있다. 설렁탕집, 야식집 너 나 할 것 없이 이른 아침부터 장사 준비를 한다. 장사는 최대 열 시까지도 하니까, 대부분의 직장인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이다. 한때 회사 그만두고 장사할 거라고 칭얼대던 나자신을 반성했다. 상인들의 부지런함을 진심으로 리스펙트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성수는 과거의 시간과 부지런한 상인들의 시간이 묻어있는 곳, 그래서 시간이 고여있는 동네다. 다음에 성수에 들른다면, 며칠 뒤 문을 닫는 팝업스토어처럼 '변하는 것'보다는 '변하지 않은 것'에 눈길을 던져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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