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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Feb 25. 2024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이토록 즐거운 것이었다니


 회사에서 무에타이 체육관을 오픈하게 되었다. 처음엔 난 체육관 일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일하는 대학 선배 중 세 명이나 코치로서의 자격이 있었고 그중 두 명은 무에타이 체육관을 각 15년, 10년씩 운영했다. 물론 나도 체대를 나왔고 무술 전공을 하긴 했지만 무에타이는 내 세부전공이 아닐뿐더러 고수들 사이에서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나는 초등부 전담 코치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몇 번 대타로 뛰었다. 나는 아이도 없고 초등학생을 접해 본 지가 십수 년이 넘었기 때문에 ‘요즘 아이들은 무섭다더라’, ‘학부모들은 더 무섭다더라’, 와 같은 소문을 듣고는 부딪치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회사 일을 병행하며 체육관을 돌봐야 하니 가끔 경력자 선배 셋이 몽땅 체육관을 못 나오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 날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체육관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전공이 어디 안 가기도 하거니와 평생 체육관을 다녀본 짬바라는 것이 있어서인지, 매일 어떤 운동을 시키고 어떤 아이에게 무슨 운동을 심화해서 시켜야 할지 한 두 번 만에 견적이 나왔다. 곧장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기본적인 지도자 스킬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무에타이 수련도 5년 넘게 했고, 지도자 자격증, 심판 자격증도 있으니 사이비도 아니다. 아이들은 내가 자기들을 이뻐하는 것을 알았고 어떨 땐 선배들보다 내 말에 더 집중했다. 엄마들 역시 아이들을 무에타이 선수 만들 요량으로 맡긴 게 아니었으니, 내가 운동이 끝난 아이들을 우르르 데리고 게임을 하거나 축구를 해도 만족해했고, 노는 아이들이 귀여워 사진을 찍고 영상을 편집해서 브이로그를 만들어 주면 또 상당히 좋아했다. 초등부 시간에 여자 코치가 있는 게 플러스요인이 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아이들은 다른 학원을 다니기 싫어해도 킥복싱 체육관을 갈 때는 엄청 신나게 나선다고 한다. 보통 교사 일을 하면 아이들이 아닌 부모님의 항의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지만 여긴 그런 일이 거의 없다. 어쩌면 군부대 근처의 군인 자식들이라 엄마들이 아이들을 과잉보호하기보다 한층 더 강하게 키우려는 탓에 우리의 응대가 쉬울 수 있을 것이라는 경력자 선배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아이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순수했다. 아이는 아이였던 것이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사촌동생들이 많았고 나는 그중의 왕 언니인 K장손이었는데 그때부터 동생들과 각종 놀이를 하며 우르르 끌고 다녔었다. 경찰 놀이를 하든 선생님 놀이를 하든 내가 있으면 동생들은 땀이 뻘뻘 나도록 재미나게 놀았고 사촌들은 나와 함께 모여 놀려고 명절을 기다리곤 했다. 그러면 나는 아이들에게 줄 선물과 제비뽑기 게임 등 다양한 것을 준비해서 꿈과 환상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어릴 적 나의 마음이 그대로 피어나는 것이었다. 아이를 키워 보지 않아서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할 줄 알았으나 오히려 반대였다. 나의 머리는 아직 엄마로 업그레이드되기 전이라 아이들의 사촌 누나쯤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철없이 아이들과 우르르 뛰어다니고 함께 은어를 쓰고 장충동 왕족발 노래를 부르고 나루토 춤을 추고 앉아 있는 것이지.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자꾸 묻는다. 대체 몇 살이냐고. 그럼 나는 500살이라며 게슴츠레 눈을 뜨고 너네 500년 전에 여기가 어땠는 줄 아냐며 논밭이 다 똥밭이었다며 너스레를 떤다.

     

 해가 바뀐 직후 4학년 짜리 한 아이가 묻는다. 

 “선생님 그럼 선생님은 이제 올해 오백 한 살이에요?”

 너무 귀여워 아이를 품에 안았더니 진지하게 되묻는다.

 “왜요? 떡국 안 먹었어요?”     


 초등학생들에게 시험 안 치냐고 물었더니 한 녀석이 깜짝 놀라며 묻는다.

 “초등학생이 왜 시험을 쳐요? 우와, 이 선생님 500살 맞네. 대체 언제 적 학교를 다니신 거야...”     


 하루는 등록한 지 얼마 안 된 여자 아이가 초콜릿을 가져와 나눠 주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과 빨리 친해지길 바랐던 나는 

 “초콜릿 먹고 싶은 사람 이 앞에 와서 줄 서서 앉아서 인사하고 받아.”

 하고 시켰더니 초콜릿이 급했던 녀석들이 하나 얻어먹어 보겠다고 줄줄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 아닌가. 나중에 한 녀석이 초콜릿 두 개를 가지고 있길래 물었다.

 “어, 넌 왜 두 개야?”

 “무릎 두 번 꿇었어요.”

 초등학생의 세계는 나름 심오하다. 나도 한 때는 지금은 사소해 보이는 것들에 이렇게 진지하게 목숨 걸어 보았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일전에 누구를 가르치는 일에 조금 지쳐 있었다. 어린 나이에 창업을 한 후 창업 강사가 되어 6년이 넘게 전국을 누비고 다녔지만 강의를 준비하고 피드백하는 그 시간 동안 소모하는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 본업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 강의가 있는 날은 아침엔 눈을 뜨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돈 때문에 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돈은 강의가 아닌 장사를 해서 벌면 되는 것이었다. 인생을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아야지 굳이 힘든 일은 하지 말자 결심이 서길래 그만두었다. 아는 강사님들을 소개해 드리며 자의로 하나씩 강의를 정리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이런 자리가 다시없다며 말이다. 하지만 내가 강의를 그만두고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코로나가 터져서 어차피 많은 강의 자리가 줄었고 나는 그전부터 글쓰기에 집중을 해서 이제껏 내공을 쌓고 있다. 자연스럽게 투잡의 체질이 전환이 되었고 그때의 내 선택에 몰표를 주고 싶다. 

 그런데 투잡을 하고도 일에 어느 정도 굳은살이 베고 할 만하니 근질근질 다시 쓰리잡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어진 것이다. 선배들이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내가 자진해서 체육관 문을 열고 아이들이 한 명씩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선배가 가르쳐 놓은 무에타이 스킬을 일주일에 2회는 나와 함께 반복연습을 하고 체력 훈련과 스트레칭을 한다. 나는 내 운동을 하면서도 똑같은 동작을 반복적으로 운동하는 게 지겨워서 아이들에게 매일 새로운 프로그램을 짜 준다. 아이들이 체육관에 도착하면 쪼르르 달려와 ‘코치님 오늘은 뭐해요?’하고 묻곤 한다.

 말을 하는 아이들의 입을 바라보는 것은 힐링이다. 말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일고, 여덟 살짜리들이 두서도 없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더욱 힐링이다. 몸으로 하는 운동이다 보니 어린아이들은 업어가며 안아가며 키우는 느낌이다. 초등학교 6학년 짜리들은 나와 키도 비슷하고 덩치도 큰데, 몸만 컸지 입을 열면 아직 생각하는 것이 나의 6학년 때와 꼭 같은 그저 아이라서 너무 사랑스럽다. 6학년 짜리가 자기도 업어달래서 똑같이 업어 주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건 귀여운 강아지를 돌보는 것과 같다. 때론 잘못해서 나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기도 한다. 그럼에도 코치님이라며 나를 좋아해 주니 다행이다. 직접 내 아이를 키우면 힘든 일도 많고 걱정스러운 일도 많을 텐데, 귀여운 제자들은 하루에 딱 한두 시간쯤 놀다가 나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돌아가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가끔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아서 곤욕을 치를 때도 있다. 많은 녀석들이 오후 3시에 체육관에 등원을 해 6시 키즈 타임이 끝날 때까지 진이 빠지게 놀다가 집에 가기 싫다며 질질 끌려 나간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중에 아이들이 체육관을 어떤 느낌으로 기억할까? 실컷 운동하고 소리 지라고 뛰어다녔던 기분 좋은 곳으로 남으면 좋겠다. 어릴 적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인가 하는 주제는 어릴 적부터 진지하게 생각해 본 온 것이었다. 매일 머리 아픈 일을 대해야 하는 직업이나, 나쁜 사건을 마주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윤리와 책임감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나는 그냥 지극히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과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좋다. 20대 때부터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만날 때면 매번 아이들의 엉뚱한 얘기를 들어왔다. ‘이보영 영어클럽’ 아이들을 가르치며 한국어를 쓸 줄 모르는 척하고 자신의 한국이름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더니, 하루는 어떤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나 클레어 선생님 한국어 이름 안다? 이보영. 가방에 쓰여 있었어.”

 나는 아이의 발상이 너무 귀여워 손뼉을 치며 웃고 말았다. 친구가 10년 넘게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알겠다. 말하자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직장 동료들이 걸핏하면 돌고래 소리를 내며 꺄아아 꺄아아 환호 지르는 긍정적인 아이들인데, 며칠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아른거리지 않겠는가.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 중인 친구가, 해마다 졸업 시즌이 되면 빈 교실 사진을 찍고 “안녕, 5반”과 같은 프사를 걸어놓은 이유도 알 것만 같다. 나는 친구들보다 경력이 10년도 더 모자란 새내기 교사지만 그런 만큼 더욱 새로운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주어야겠다.


 일 년에 몇 달을 외부에서 보내는 나의 유일한 걱정거리가 ‘강아지들이 보고 싶어서 어쩌지’였는데, 올해엔 집 밖을 나서며 ‘오랫동안 제자들을 못 봐서 어쩌지’ 하는 걱정이 보태어질 것 같다.     





아이들 놀게 해 주려고 산 뽑기기계 내가 먼저 집에서 뽑아봄. (도박은 파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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