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한국소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을 했다. 같은 달에 나는 서울에서 충북 음성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곧 이은 2월 말, 코로나19가 터졌다. 교묘하게도, 시골에서 은둔하며 글을 쓰라는 계시와도 같이, 2020년 2월부터 나는 꾸준히 글을 썼다.
아니, 사실 그전에도 글은 꾸준히 썼다. 2016년 첫 책인 <서른 살, 나에게도 1억이 모였다>를 출간하고 난 후 글공부에 대한 갈증이 엄청나게 솟구쳤다. 그냥 쓰고 싶지 않았고 조금 더 잘 쓰고 싶었다. 그렇다고 문학가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문학적 재능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무언가 발산하고 싶을 적이면 그냥 글을 썼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누군가 욕을 하고 싶은데 면전에서 할 수 없으니 한글 프로그램을 켜놓고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다 했다. 그럴 때면 하고 싶은 말들이 폭발했다. 그러면 나는 피아노 건반 두드리듯 빠른 속도로 타이핑을 쳐가며 신들린 듯 글을 썼다. 입 밖으로 내거나 표현하는 대신 속으로 삼키면 인간관계에 꽤 도움이 된다. 또한 이렇게 썼던 것들이 글쓰기 연습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제껏 다른 사람 글을 필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다른 사람의 글은 그 사람의 글이고, 나는 어찌 되었던 스스로의 개똥철학으로 점철된 나만의 글 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따라 하거나 표방하지 않는 나 그 자체이고 싶었다.
서울이란 참 인프라가 좋은 곳이다. 서울에 있는 동안 나는 해볼 수 있는 것들을 다 해 보았다. 성인 발레를 배웠고, 폴댄스를 췄고, 저명한 시인 선생님에게 시 쓰기 강의를 들을 수 있었고, 유명 소설가 선생님에게 소설 쓰기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일에만 빠져 살며 아웃풋만 줄기차게 해대던 나에게 글공부를 하는 시간은, 새롭게 인풋을 할 수 있는 오랜만의 기회라 머릿속의 녹슬어 있던 부분이 '뻥뚫어'로 청소 당하는 기분이었다. 글은 참 좋은 취미생활이었다. 그림처럼 도구나 물감 값이 들지 않았고 운동처럼 공간의 제약을 받지도 않았다. 노트북 한 대만 있으면 시공간 상관없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몹시 간편한 일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면, 노트에다 깔짝거리며 쓸 수 있는 것이 글이다. 혼자서 글 쓰는 시간을 점점 찾게 되었다.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는 것은 몹시 멋져 보이는 일이었다. 풍경이 좋은 논두렁에서 돗자리 펴놓고 사색을 하는 것은 무척 낭만 있는 일이었다.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조명의 조도를 맞추며 글을 쓸 준비하는 것은 매우 있어 보이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닌 글 쓴다며 똥폼 잡는 일을 좋아했다.
그렇게 글을 쓰겠다며 날마다 폼을 재니 글이 조금씩 늘었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기는 것처럼, 글을 쓰는 일도 딱 내가 하는 만큼 정직하게 근육이 붙었다. 처음에 나는 주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걸핏하면 비문을 써내는 초보자였는데 몇 번의 지적을 받고 나니 어떻게 써야 제대로 쓰는 것인지 점차적으로 감이 잡혔다.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닌 겨우 제대로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소설 공부를 하던 초반의 일이었다. 처음엔 원고지 80매 분량의 단편소설 한 편도 써 내 가기 버거웠다. 글의 스토리와 결론만 좇아 글을 쓰다 보니 인물의 캐릭터라는 것이 들러리처럼 밋밋하게 그려졌다. 소설을 쓰려면 소설의 주인공이 읽는 사람으로부터 공감할 수 있는 그럴듯한 소설 속의 캐릭터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납득할 만한 캐릭터는 ‘실제 내가 아는 이 인간이 그런 인간인데’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캐릭터를 배워 갔다. ‘주인공이 입체적이어야 한다’, ‘생동감 있게 그려야 한다’와 같이 말하는 작법서를 적게 보지 않았으나 나에겐 크게 소용없는 일이었다. 쓰기 전에는 모른다. 다 써 놓은 내 글을 본 후에야 뭐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처음 내가 들어갔던 소설반은 소설 쓰기에 대한 체계적인 작법 설명 대신, 주야장천 단편소설을 돌아가며 써 온 후에 합평을 하게 했다. 내가 들었던 시 쓰기 강의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쓰니 죽이든 밥이든 글이 만들어져 갔다. 점점 쓰다 보니 내 소설에는 별로 큰 사건이 출현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읽은 단편소설들이 기승전결보다는 밋밋하게 흘러가다 다소 모호한 결론을 내길래 그대로 따라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다. 모든 이야기에는 싸움이 있어야 한다고. 상대방과 싸우고 악역과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고. 소설은 싸움이라는 것을 한참 후에 알았다. 그리고 그런 소설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아갔다. 그제야 소설을 어떻게 써야 되는가 감이 좀 잡히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소설가로 등단을 하고도 3년 여가 지나서 알게 된 깨달음이었다.
아마 글을 쓴다는 것은 더 많은 공부를 요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저 앞으로 배워 나가며 쓰는 글이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로 쓰고 또 쓴다. 왜 쓰냐고 묻는다면 그냥 손이 가서 쓴다. 살면서 매일 소비하는 시간의 끝자락을 붙들고 싶어서 쓴다. 하루에 한, 두 시간만 할애하면 365일이 지난 후 꽤 많은 분량의 결과물이 남는다. 그것이 기특해서 쓴다. 글을 쓰고 나면 뭔가 남는 장사를 했다는 기분이 확실히 드는 탓이다.
돌이켜 보면 글은 나에게 운명처럼 곁에 있었다. 어릴 적 나는 체육대학에 진학을 해서 운동선수로 살아가는데 여념이 없었는데, 아빠가 웬일로 지인들과 점집에 다녀왔다며, 점집에서 내가 시인이 될 거라는 얘기를 했는 것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뭘 점을 보러 다니냐며 웃었다. “운동하는 애한테 뭔 문학이여...”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나는 정말 문인이 되었고 돌이켜 아빠가 보았던 점괘를 생각해 보자니 어쩌면 내 마음이 가는 일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더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내가 초등학생 때 다니던 학원에 논술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아동문학가였다. 신기하게도 이때 만났던 아동문학가 선생님과, 내가 마지막에 배운 소설가 선생님의 존함이 꼭 같다. 나는 그때 책을 낸 작가를 처음 보게 되었는데, 선생님이 낸 동시집을 보며 몹시 고무되어 이래저래 동시를 써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로 창원시에서 주최하는 한 글짓기 행사에, 1등을 한 적이 있다. 그러려니 했다. 어쩌다 한 번 얻어걸렸겠지.
고등학생이 되어 시 낭송 대회라는 게 있길래 재미 삼아 출전해 보았는데 1등을 했다. 그리고 일 년여간 문학평론가 선생님을 쫓아다니며 한 달에 한 번씩 시인을 초청해서 여는 토크쇼에 참가했었다. 열아홉 감수성에 꽂힌 시의 감성들과 매달 한 편씩 시인 앞에서 시를 낭송하는 알바 자리를 구하게 된 것이다. 그러려니 했다. 그때도 나는 그저 운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세월이 많이 흘러 돌고 돌아 나는 다시 글을 쓰는 일에 집착하고 있다. 혹시 여기가 내 자리인가? 마침내 천직을 찾게 된 건가? 이 크게 돈도 안 되는 일에 나는 벌써 수년째 매진하고 있다. 스스로 글 쓰는 사람이라 여기며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글을 쓰며 소설가라는 이름에 붙여진 갖은 혜택을 얻어 레지던스를 얻고 글을 기고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참 신기하고 신비롭다. 어쩌면 이토록 글을 쓰는 일에 푹 빠질 수가 있는 것일까.
얼마 전 독감에 걸려 이 주 정도 앓아누웠는데, 오랜만에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써 보려고 했는데 글이 써지지 않았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글은 쓰면 쓸수록 더 쓸 수 있었는데. 컨디션에 따라 아무리 해도 마무리가 되지 않는 글만 나오는 것이다. 그때 생각했다. 아, 글이라는 게 영원히 쓸 수 있는 것이 아닌 언젠가 나이가 들어 몸이 쇠약해지면 못 쓸 수도 있는 것이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힘이 있을 때 한 자라도 더 써야겠다 싶어 이렇게 노트북 앞에서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다음 주면 또 글을 쓰러 떠난다. 시골은 글 쓰기 참 좋은 환경이지만 주기적으로 떠나고 또 돌아오면 더욱 자극을 받게 된다. 작년 한 해 동안 원주, 함안, 함양, 태안을 떠돌며 짧게는 한 달씩, 길게는 3개월씩 글을 쓰러 다녔다. 올해는 또 어딜 여행하며 글을 써 볼까나? 유명 작가의 말처럼, 글감에는 무게나 부피가 없어서 어디든 이고 지고 다닐 수 있다. 쓰는 삶, 참으로 좋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