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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Apr 14. 2024

일 년에 절반은 떠돌아다니며 삽니다

30대 혼자 사는 여자 디지털 노마드가 된 사연

 

 부모님은 아직 고향에 살고 계신다. 그래서 나는 주기적으로 고향을 방문할 수 있다. 만일 부모님이 아니라면 어릴 적 살던 동네를 방문하는 일은 극히 드물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도 어릴 적 기억들이 더 빨리 증발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운전에 조금 자신이 생긴 후로는 집에 내려갈 적에 차를 끌고 내려가기도 한다. 차를 몰고 다니다 보면 더욱 많은 곳을 돌아다니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스친 듯 지나더라도 어릴 적 내가 다녔던 중학교, 고등학교 부근을 지나게 된다. 그럴 때면 아직도 숨이 턱 막힌다. 그 옛날 싫었던 기억이 한순간에 떠오른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의 텁텁한 냄새, 사물함에서 체육복에 꺼낼 적 나는 곰팡내, 쉬는 시간마다 지옥에서 아규하는 듯 친구들이 떠들던 소리, 급식소의 정신없는 분위기와 하수구에서인가부터 올라오는 듯한 급식소 특유의 묘한 냄새...... 나의 가장 예쁘고 활발했던 10대 후반을 나는 학교에서 짐승처럼 사육당한 느낌이다. 시간 맞추어 등교를 해야 했고, 밥 때 되면 밥을 먹어야 했고, 정해진 과목의 수업을 들어야 했으며 시험을 쳐야 했다. 학생의 인권 따위는 없던 시절이었다. 성적이 나쁘면 욕을 먹었다. 한 선생님은 공부를 못 하는 학생에게 대놓고 ‘인간이 아니다’며 서슴없는 인격모독을 했다. 우리 때 맞고 벌 서던 얘기는 말을 말자. 나만 맞은 게 아니었을 테니까. 언젠가 필라테스 학원을 가서 트라우마와 마주한 적도 있다. 학교 다닐 적 기합 받던 동작과 비슷한 것을 자꾸만 반복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엄청 눈에 띄는 반항아가 되지도 못했다. 교복 사이즈를 줄이지도, 깻잎머리를 하지도 않았다. 머리끝만 노랗게 탈색을 했는데 발레 전공생처럼 똥머리를 하고 다니며 학교에서는 티가 나지 않게, 학교 밖으로 가선 머리를 풀고 일탈을 하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여학생이 선생님에게 기합 받고 얻어맞았던 것이 말해주듯 고집 세고 말을 안 들었던 것 같다. 만만한 선생님 수업 시간에 무단으로 이탈을 해버리거나 야자 시간에 친구를 끌고 ‘튀어’ 버렸다. 심오한 상담을 권하는 선생님에게 얄밉게 말대꾸를 했다.

 ‘그래서 이게 제 인생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 건데요?’

 ‘저는 다들 살 듯 그렇게 살기 싫은데요?’

 ‘그거...... 애들 통제 잘하기 위해 선생님 편의에 따라 하시는 말씀 아닌가요?’

 그럼에도 학교는 나에게 친절했다. 나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이려 노력하는 선생님이 있었고, 기행을 일삼는 나를 희한하게 보는 친구도 있었지만 일정이나 공지사항을 꼭 챙겨주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제시하는 시스템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왜 매일 쓸데없는 공부를 시키나, 세상에 나가 할 일도 많은데 생각하면 무척 우울해졌다. 어른들은 학교도 못 견디면 앞으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 나갈 거냐며 힘들어도 참고 해 보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학교를 다녔다. 고1 때 자퇴를 하겠다고 했다가 엄마한테 두들겨 맞고 포기했다. 두려운 건 맞는 게 아니라 엄마가 흘릴 눈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평생 조직에 몸담지 않게 되었지만 10대의 날들은 그렇게 보냈다. 세상에 마이너스는 없기에 나름 인내를 배우는 시간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한정된 아까운 시간을 쓰는 데에 최선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고3이 되고 난 후로 나는 나의 진로를 중국 유학으로 결정했다. 입학을 하는 방법은 한국보다 쉬웠다. 다만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출석일수뿐이었다. 잘리지 않고 무사히 졸업을 할 수만 있으면 되었다. 학교에 나갔다가 모의고사를 치는 날이면 몰래 빠져나가 탈색머리를 풀고 립스틱을 바르고 시외버스를 잡아 탄 다음 학교 밖을 떠돌아다녔다. 다음 날이면 다시 학교에 가야 했지만 일단 하루는 내 멋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사람들을 보았다. 평일 낮에 거리를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등하교 시간에 보이는 사람들과는 달랐다. 결심했다. 나는 꼭 평일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되리라. 그리고 스무 살이 넘은 나는 자영업을 하며 어느 정도 그 기준을 채웠다. 내가 작정만 하면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대가를 받았다. 딴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만큼 매출의 차이를 보였고 막상 돌아다니려고 하니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사실 노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엉덩이 붙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는 것만큼 편한 일도 없었다. 그렇지만 언제든 직원들에게 일을 맡겨 놓고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만족스러웠기에 내 삶의 질에 무척 만족했다. 그리고 일을 하면 할수록 일은 잘 되었다.


 <서른 살, 나에게도 1억이 모였다>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28살부터 30살까지 3년에 걸쳐 첫 목돈 1억을 만든 이야기였다. 그런데 책이 나오고 난 후 원래 하던 창업 강의가 이전보다 많이 들어왔다. 최장 무려 120시간의 커리큘럼으로 진행되는 강의 몇 군데가 생기자 일주일에 몇 번 밖에 출강하지 않는데 고정적인 강의 수입이 월 500만 원 이상씩 들어왔다. 이 때는 너무 바빠서 회사에 신경을 크게 쓰지 못해 매출은 고만고만했는데 그래도 이것저것 떼도 한 달에 500만 원 이상은 남았다. 물론 사업을 계속해야 하니 재투자를 하는 비율을 감안하더라도 한 달에 천만 원 이상 벌리는 것은 놀라웠다. 부모님 용돈을 천만 원씩 드려도 무리가 없었다. 유학 가 있는 동생에게 넉넉하게 용돈을 부칠 수 있었다. 딱 일 년을 하고 나자 현타가 왔다. 돈 쓸 시간은 물론 없었다. 나는 생각할 시간도 없고 다른 무엇을 해 볼 여유도 없이 그저 기계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돈을 벌 시절은 오로지 돈을 버는 데에 집중해야 하는가 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런데 나의 목표는 1억이었나 보다. 1억을 모으고 나자 특별히 목표가 되는 것이 없었다. 다시 부지런히 2억을 모았고 3억을 모았지만 내 목표는 10억, 100억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혼자 사는데 적당히 만족스러울 집을 얻을 수 있었고 갖고 싶은 차 한 대 사 볼 수 있었고, 꿈꾸었던 사옥을 하나 지을 수 있었다. 그 사이 동생은 취업을 했고 부모님도 여전히 일을 하셨기 때문에 모든 집안이 평화로웠다. 나는 자아를 찾고 싶어졌다. 그즈음 강의 개수를 하나씩 줄이며 가기 시작한 곳은 시 쓰기와 소설 쓰기 반이었다. 나는 아주 옛날부터 글을 잘 써보고 싶었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바이올린을 잘 키고 싶다거나, 농구를 잘하고 싶은 것과 같은 자아실현적인 욕심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강의를 하나씩 접으며 아는 강사님들에게 소개를 드리자 모두들 눈이 동그래져 물으셨다. 왜 이 자리를 마다하냐고. 만일 강의가 지속적으로 보람찼다면 더 오래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업 강의는 나와 좀 맞지 않았다. 창업을 강의로 배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기도 하거니와 내가 봐도 가능성이 적어 보이는 사람들이 강의를 잘 들어 창업을 해보겠다고 열심히 내 말을 듣는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진짜 창업을 하고 싶은 사람은, 더 나아가 창업으로 크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만의 무엇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이것은 강의를 듣는 것보다 좋은 책을 한 권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창업의 본질에 대해 열변을 토해 보았지만 내 강의를 듣고 성공했다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 강의가 아니더라도 성공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보람이 없는 일은 억만금을 줘도 지치는 것 같다. 미련 없이 강의를 접고 나는 시골이라 불러도 좋은 곳에 작은 사옥을 지어 내려왔다. 거짓말처럼 새 사옥의 첫 삽을 뜨던 그 해에 소설가로 등단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소설가라는 이름을 달자 깔아 준 멍석 위에서 뭐라도 되는 것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자판을 두들겼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코로나19가 터지며 그간 내가 했던 많은 강의들이 축소되었다. 나는 더욱 칩거를 하는 듯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전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회사도 지각변동이 생겼다. 이제껏 혼자 일하다 대학 선배들과 함께 법인을 합치고 동업을 하게 되었다. 혼자 일할 때의 부담감이나 압박감이 줄었다. 무엇보다 일이 세분화되니 내가 할 일이 더욱 선명해졌고 나는 집중해서 대외 홍보와 영업에 신경 쓸 수 있었다. 그간 내에게 가장 취약했던 제품 생산에서 자유로워지니 편했다. 또한 지금 회사는 안양과 이천 두 곳에서 CS와 배송을 맡아주고 있으므로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노트북을 들고 어디든지 다니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서른 중반, 처음으로 돈과 시간에 모두 자유로운 상태의 삶을 살게 되었다. 물욕, 식욕, 소비욕이 없는 편이고 혼자 사니 적당한 돈만 있으면 크게 어려운 일이 없다. 계산을 해보니, 월세, 관리비, 자동차 유지비 등 모든 것을 포함해도 한 달 생활비는 140만 원 전후 밖에 소비되지 않았다. 적당히만 일해도 저축도 하며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코로나가 끝나고 지방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알게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살다 보니 그 생활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한 달 살기를 하더라도 숙박비를 기본적으로 지원받으니 오히려 집에 살 적보다 더 적은 돈이 들었다. 외부에 나가 있으니 더욱 절제하며 살게 되고, 없으면 없는 대로 대충 살았다. 살아보니 그렇게도 살아졌다. 내 집에 쌓아두고 사는 필요 없는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했다. 살고 싶은, 또한 살 수 있는 지방은 참 많았다. 매달 빠짐없이 열심히 돌아다니며 산다고 해도 일 년에 12곳 밖에 갈 수 없다. 올해는 벌써 2월에 서울 명동에서 한 달을 살았고, 전남, 전북 등지로 또 떠날 계획이다. 새로운 곳이 어디 있나 알아보고 신청을 하여 선정이 되는 일은 무척 기쁜 일이다. 외부에 나가 있으면 나는 그 어떤 때보다 옴팡지게 일을 한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일을 하는 티를 팍팍 낸다. 그래야 사무실을 지켜 주고 있는 선배들에게 체면이 서기 때문이다. 하루 8시간 집중해서 일을 하고, 아침과 저녁 1시간씩 글을 쓴다. 글 쓰는 건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으므로 유튜브로 키보드 ASMR 라이브를 하면서 쓴다. 일을 하기 때문에 글을 써서 돈을 벌지 않아도 크게 상관이 없다. 원하지 않는 글을 기고할 필요도 없고 누구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어서 출간해야 할 텐데, 빨리 결과를 보여야 할 텐데 조바심을 내지도 않는다. 나는 20대 때 운동선수를 해 본 적이 있어서 안다. 당장 성적이 나오지 않더라도 꾸준히 하며 쌓이는 내공은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 것임을. 나는 꾸준히 준비를 할 뿐, 준비를 많이 해 두면 해 둘수록 좋은 기회가 올 줄로 믿는다. 매일 그렇게 한 자 한 자 늘려가며 써간다. 내 엉덩이의 힘을 믿는다. 쓸수록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뜩이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글을 보는 눈도 늘었다. 아무리 글쓰기 수업에서 합평을 하고 글 쓰는 스킬에 대한 수업을 듣는다고 해도, 직접 많이 써보는 것이야 말로 가장 좋은 수업인 줄로 안다. 그래서 쓰고, 쓴 것을 읽고, 다시 고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매년 쓴 글을 비교해 보자면 확실히 글은 늘고 있었다. 글을 잘 쓰는 수많은 전공자나 재능이 있는 사람에 비할 수 없는 얼기설기한 글이지만 그래도 거북이처럼 이라도 늘고 있으니 단순히 즐거워서 쓰는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만족감이 몹시 크다. 하지만 글을 잘 쓴다고만 해서 그 글이 읽는 사람에게 가닿느냐 하냐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서 더욱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혼자 다른 도시의 낯선 방에 가서 멀뚱히 앉아 있으면 그런 복합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내 집에서 한글 자판만 들여다보며 나무를 다듬던 것과는 다르게 숲을 보는 시각이 외부를 씽씽 달리다 보면 나온다. 그건 사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창업을 하면서도 그랬다. 굉장히 오랫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사업의 방향을 가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사업을 하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시간이 바로 그것이라고 본다. 혼자 이렇게 저렇게 해보고 나만의 스타일을 찾는 것. 나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낑낑대며 정상을 찍을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운동도 그랬다. 코치가 백날 말해주어 보았자 혼자 끙끙거리며 자신의 사점死點을 넘지 못하면 성장할 수 없다. 글도 매한가지라 본다. 이렇게 강아지처럼 매일 끙끙거리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매번 새로운 도시를 다닌다.


 학교 교실에 정해준 내 자리가 참 싫었던 고등학생은 이렇게 자유롭게 다니는 떠돌이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 나이가 든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어릴 적 못 해 보았던 내 멋대로 사는 방법을 터득하고, 스스로 가고 싶은 길을 정해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트북을 들고 집에 와 부모님 집에서 2주 동안 머물다 다시 내 집으로 돌아간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엄마가 바리바리 싸 준 짐이 한가득이다. 집으로 돌아가고 또 떠날 준비를 하고. 올 한 해도 이렇게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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