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지친다.
나는 정말 다양한 것들과 싸워 이기고 살아남아 가는 중이다. 그중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관계와 선입견이다. 사실 글을 쓰면 쓸수록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가정은 꽤나 잘 살아가고 있다. 서로에 대해 끈끈하고, 사람이 많아 보다 깊으며 넓다. 드는 돈과 걱정과 에너지가 당연히 꽤 있는 편이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집의 정서를 담당하는 내가 이 과정을 성숙을 향하는 과정이라고 여길뿐더러 대부분의 시간은 아이들의 웃음에 녹아내린다. 그래서 내가 가고자 하는 이 생의 끝도 결국 평안이기에- 그 평안을 바라보며 뚜렷하게 향하는 목표가 있기에 현실에서도 그 모양을 어설프게나마 쫒고, 실현하고, 누리며 산다. 일에 있어서도 적당히 경력이 갖춰져서 인사이트가 보이고, 동시에 아직 적당히 재미가 있어서 빛바랜 시야로 일을 바라보지 않는다.
오늘 나는 회사에서 울었다.
내 상사는 청렴결백해 보이고자 하고, 그래서 특히 청빈을 미덕으로 삼는다. 사람으로서는 좋은 성품이다. 하지만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이 업계 생태계 상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상위 벤더에게 보여주기 위해 마케팅 비용을 써야 하기도 하고, 내 상사의 상사는 평소 회사 비용으로 회식도 자주 하고 고객사들에게 후한 대접을 하는 게 영업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씀씀이가 큰 편이다. 특히 어느 시점부터는 해외에 나갈 일만 있으면 본인이 꼭 나서서 가는 편이며, 그때마다 비즈니스 비행기 값이나 그곳에서 사용한 비싼 밥값들은 팀의 판관비에서 빠지는 구조라 팀의 평가에 반영된다. 내 상사는 그의 상사를 매우 부도덕하게 본다. 그래서 항상 의견이 갈린다. 이렇게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 조직장의 위치에 있다 보니 아래 팀원들은 역할 갈등이 자주 일어난다. 두 조직장 사이에 벌어지는 골을 메우기 위해 문서도 많고, 새로 만들어야 하는 일들도 많다. 같은 일도 두세 번씩 두 조직장 사이에서 컨펌을 번복해 가며 일을 해야 해서 매우 피곤하다. 하지만 모든 회사가 그렇듯 사업의 발전과 확대를 위해 새로운 것들을 결정해야 할 것들은 점점 많아지고, 이런 부분일수록 이 두 조직장들 사이에서의 피로가 심해지는데 다들 이 일을 귀찮아하고 어쩌다 보니 내가 그 일을 하게 되는 구조가 되었다. 일이 굉장히 피곤하다.
두 남매를 키우는 선배가 있다. 평소 강한 T성향에 여러모로 본인의 세계에 강한 확신을 갖는 사람이라 대화할 때 유의해야 하는 편이다. 어느 대수롭지 않은 날이었다. 그저 내가 일에 지쳤고 사람과 관계에 대해 살짝 회의감이 들었을 뿐이다. 어릴 적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 싶지만 그래도 그날은 나도 지친 티를 흘렸다. 말이 톡 쏘고 표정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그 선배도 업무와 관계에 지친 나를 위로하고 싶었나 보다. 좋게 포장하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사실 티를 내는 내 모습이 보기 싫어서 몇 마디 하려던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선배야말로 우리 팀에서 자주 회자되는 거친 성향의 사람이고, T의 성향은 타인을 위로하거나 예민한 사람을 달래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두서없이 시작한 그의 몇 마디는 이내 몇 마디의 생채기를 내며 산으로 흘러갔다.
- 일에 있어서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마라. 남는 거 없다. 나봐라 대충 산다. 그래도 결과가 잘 나온다. 다 너 하기 나름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네가 어려움을 겪는 그 사람은 관계지성이 덜떨어진 사람이다. 기계 같은 사람이다. 인격이 없다. 그러니 너도 기계로 대해라.
적당히 그의 요점만 들으려고 했지만 점점 나와는 다른 가치관을 강요받는 느낌에 대화를 정리하고자 했다.
- 나 역시 아이 셋 키우며 회사생활에 부차적인 감정 섞지 않으려고 멘털 관리를 하는 편이다. 하지만 정도가 넘을 때 가끔 나도 티가 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일을 줄이고 덜 스트레스받고 편히 살고 싶다. 하지만 선배가 안 하는 일 내가 하는 것 아닌가. 일을 좀 가져가 달라. 허허허.
웃으며 마무리하던 대화에 갑자기 선이 넘는 말이 넘어온다.
- 너 애 셋 키우면서 힘든 티 내지 마. 애 하나 키우는 사람도 그 나름으로 힘들고 애 둘도 그 나름으로 힘들어. 너만 세상 힘든 줄 아냐?
초점이 왜 그리로 튀었는지 모르겠다. 애 셋 키우는 게 유세냐는 식의 말이 일 얘기하던 논리에 무슨 근거로 툭 튀어나오는 것이며, 실제 살아본 적 없는 삶을 함부로 얘기하는 매너는 무엇일까 하며 날이 선다. 다른 이들의 육아와 일상에 대해 폄하한 적도, 낮잡은 적도 없다. 그저 내 삶이 꽉 차있는 것일 뿐 비교한 적도 없다.
그러더니 연이어 자신이 들은 게 있다며 얘기한다. 나의 육아기 단축근무 연장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첫 번째 단축근무를 쓰고, 연장을 하면서 아무런 말도 없이 결재 기안만 떡하니 올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건 아니라고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실상은 이러하다. 나는 육아기 단축근무를 쓰고 있다가 지난달 다시 정상근무를 하기로 했는데, 결과적으로 막내가 원 생활을 적응 못하는 핑계로 육아기 단축근무를 연장하기로 했다. 오랜 시간 가족들과 의논하면서 결국 첫 번째 육아기 단축근무 기간 마지막 날에 되어서야 연장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고, 나는 팀장님께 의사를 밝히며 두 번째 단축근무 시작일을 회사 내규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최소기간이 언제든 일단은 정상 복귀를 하고 그 뒤에 처리되는 날부터 다시 단축근무를 하기로. 한 달이든 보름이든 등하원 이모님이든 친정부모님이든 방법을 마련한다면 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되려 팀장님은 왜 인사팀도 처리하기 번거롭게 그런 방법을 하냐며, 결재만 빨리 받아주면 되니 걱정 말라고 했다. 당장 다음날부터 단축근무 연장을 시작할 수 있도록 결재자들을 찾아가 재촉하며 기안을 통과시켰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지만 팀장님이 나서서 하신 일이었다. 나는 애 엄마라는 이유로 내 일에 대한 전문성에 대해 폄하받고 싶지도 않고, 이왕 일을 하는 거면 할 몫은 하는 사람, 더 나아가 여력이 된다면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뭇사람들에게, 정말 뜬금없는 사람에게 '애 셋 워킹맘' 딱지는 아직도 이런 취급을 받는다. 사실 내가 정말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결재나 띡 올렸다면 이렇게 오래 한 회사에 다니고 있을 수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회사는 정말 아무나 대체될 수 있다. 그것에 대해 부인하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이 위치의 톱니바퀴로 살면서 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눈에 띄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부정적인 요소 중에 하나가 '애 딸린 여자'라는 것으로는 더더욱 비치지 않고 싶다. 실로 나는 아이를 키우며 멀티 능력이 더 향상되기도 했으며, 미성숙한 이들을 다루기 위한 최고의 역량인 인내를 배워간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아이들의 애교로 사라지기도 하고, 굳이 큰 스트레스가 아니라면 멘털 관리를 위해 털털하게 털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도 알려하지 않고 의례 '애 딸린 아줌마'로 나를 바라보는- 저 철없는 건지 꼰대 같은 건지 모르겠는 시선에 매우 울분이 터졌다. 팀 내에 필요한 업무들은 하지도 않으려 하면서, 딱 본인 것만 하려고 하면서- 그런 업무들을 도맡아서 하는 사람 중 하나인 내가, 어느 날 감정의 티를 냈다고 '역시 애 셋 워킹맘은'으로 시작되는 프레임을 걸어버릴 수 있는지 화가 났다. 그 사람이 매번 사람들 앞에서 나를 두고 애국자라며 떠들었던 사람이기도 한 것도 불만스러웠다. (참고로 나는 그 소리를 정말 싫어한다. 애국이라는 귀한 감정을, 꼭 다산에 빗대어 말할 때는 이상한 측은함이나 '나는 저 고생길이 훤한 미련한 선택을 안 할 거지만 너는 대단하니 굳이 칭찬한다면 애국자'라는 묘한 뉘앙스를 담는다. 물론 모든 이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단단히 선을 넘은 선배의 태도에 울음이 나며 물었다. 대체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애 셋 워킹맘이니 이 회사에서 나가길 원하느냐. 그랬더니 설마 그러겠느냐며, 그럼 이 일들은 다 누가 하게 한다. 회사는 정말 아무나 대체될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후임자 외에도 조직 내 구성원들이 자신이 외면하던 잡무들을 하나 둘 다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겠지. 과연 지친다. 본질적으로는 결국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예의를 갖춰 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쉽게 나의 특별한 상황들을 마구 활용하여 묘한 피곤을 준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버티다 보면 10년, 20년 뒤엔 내 마음이 잘 정리가 되어 이런 말들에 무뎌질까? 내 후대의 세대에게 이런 갈등을 잘 버틸 수 있는 지혜를 나는 물려줄 만큼 성숙할 수 있을까? 생각이 자녀에게 닿으니 갑자기 이런 질문도 든다. 내 자녀의 시대에는 이런 갈등이 존재할까? 잘 모르겠다. 가까운 미래에 나는 AI 법인격이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절머리 나게 싫지만 또 역행할 수 없는 기술의 발전은 가까운 미래에 실현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AI가 가득한 세상은 이런 선 넘는 편견이나 미성숙한 발언, 예의 없는 언사가 없는 곳일까? 영화 <가타카>처럼 인간다운 오점들이 모두 사라진 신인류들 사이에서는 이런 시절의 폐해들이 이해라도 될까? 마치 서울대 졸업한 미쓰김이 커피 타는 심정을 지금 세대가 공감하지 못하듯 시대적으로 전혀 공감되지 않는 시절을 사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 시대에 나는 과연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나의 부모 세대가 쌓았던 덕과 가치가 지금에서는 효용이 없는 것이 있듯 나와 내 자녀의 세대 역시 그런 갭이 있을 텐데, 나는 과연 가치 있는 것에 중심을 두고 잘 살아가는 것일까?
나 역시 '애 셋 워킹맘' 엄마를 두었다. 엄마는 꽤 여러 방면으로 지혜롭고 우수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젊은 시절 아이 셋을 키우며 버텨온 그 값진 경험은 지금 내 삶에 모두 반영될 수가 없다. 시대가 추구하는 교양의 방향이 다를뿐더러, 기술이 다르고, 세계 정치와 경제가 다르며, 나 역시 그녀와 다른 직업을 갖고 살아가기에 과연 그 노하우들이 내게 그만큼의 의미로 적용되기 힘들다. 그녀가 숨 참아가며, 울음 참아가며 터득한 지혜는 지금 내게 그만큼의 가치로 남겨지지 않는 안타까운 것들이 있다. 하지만 수백 번의 울음을 딛고 수천번의 자기 부인과 수만 번의 겸손의 끝에 그녀의 삶의 정수는 어떠한 특정의 지혜를 낳았고 그 지혜는 내게 계승된다. 1 가구 1 유선 전화기는커녕 마을에 전화 있을까 말까 한 시대에 태어난 그녀가 네모난 벽돌을 귀히 어루만지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나에게 신앙과 세간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심령과 인간에의 측은지심을 남기었다. 사회적 교양의 수준에 대한 의식과 지덕체의 건강에 대한 가치, 물질로부터의 자유와 자기 부인의 평안, 자기 객관화로부터 오는 겸손 등 그녀의 삶의 정수는 내 삶을 관통한다. 그 지혜를 그녀는 어디서 얻었을까? 수준 높은 지성과 학문에의 부지런함, 성실한 관심 등 선천적인 기질에도 기인한 것이 있겠지만, 결국 그 지혜가 닦이는 과정은 그녀 인생의 풍파였으리라. 그 시절- 엄마는 애 셋 워킹맘이라는 딱지가 지금의 나보다 더 지독했을 시절을 났으며,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쉬운 생은 아니었다. 자녀 셋 모두 엄마의 mbti를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녀는 부지런히 도 사회화가 되었다. 비록 사춘기시절 그 고된 생의 엄마에게 모질게도 '난 엄마와 같이 감정을 거세당한 채 살아가기 싫다'며 소리치던 내가 그녀의 풍파에 한 자락을 덧대었을지언정, 그녀의 지혜는 아이러니하게도 귀하게도 포장되어 내 삶에 선물로 전승되었다. 생각이 여기에 닿다 보니 지금 나의 지치는 순간들은 꽤나 필연적이라고 보인다. 힘들 일들과 지칠 일들을 좀 더 머리를 써서 피해 가고 경제적으로 맞닥뜨리고 싶어도 그냥 이 삶을 묵묵히 버티는 게 내 할 일이지 싶다. 나는 내 엄마와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그래서 엄마가 버틴 삶의 모양을 보고 나 역시 그 열매를 기대하며 무던해져 본다. 그 모양은 거슬러 오르고 오르면 결국 신앙의 모습과도 닿아있기에.
그래서 과연 지치긴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달라지는 건 없다.
그냥 울고 털고 마음 매무새를 다잡아 대화를 잘 마무리하고, 다시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와 다시 아이들을 키운다.
그러면서 나도 한 뼘 더 커보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