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다르게 살아도 괜찮을까 자문해 보던 여름날
1.
이른 휴가를 다녀왔다.
산업군에 따라 다르겠지만, B2B 마케팅은 보통날 좋은 날 바쁘다. 4-6월, 9-11월까지가 성수기라면 성수기다. 행사가 많고 마감들도 많아서 바쁜 일상이었다. 올해는 특히 5월에 행사가 몰렸었는데 무사히 잘 마치고 6월 초 이른 휴가를 다녀왔다.
2.
AI에 대해 비교적 빠른 관심으로 접하기 시작했고, 경험해 보는 과정 중에 흡수력과 파급력이 거대할 것이라는 짐작을 마주했다. 거대한 파도가 쓰나미처럼 달겨드는 전방의 시야와 달리 하나씩 할 수 있는 것을 해가며 대하다 보니, 쓰나미 사이에 작은 모세의 기적 정도는 보이는 것 같고, 그게 신기루일는지 진짜 살 문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그리 걸어가는 중이다. 그 문 중 하나는 ‘안정적인 정서’이다.
3.
예를 들면 이런 고민들이다.
이제 학교를 들어가는 아이를 위해 과연 영어공부를 시킬 필요가 있을까 하는. 내가 지낸 교과과정상에서는 3학년부터 영어를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시작해 계산해 봐도 국내에서 영어를 잘하는 쪽에 속하여 20여 년을 지내왔다. 내가 지낸 시절에 영어를 잘하는 것은 어디를 가나 우수한 취급을 받는 능력이었다. 수포자 직전까지 갔던 나 역시 결국 서울 명문대 중 한 곳에 수석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저력이 되어 주기도 했다. 돌아보면 그 당시, 내가 7세 정도 되어있을 시절 말이다. 그 시절에 영어가 이렇게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중요하다고는 생각했겠지만 그게 이 정도의 힘으로 여겨졌을까?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하자면 지금 내 시대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갖는 위상정도를, 나의 자녀들이 그들의 시대에 영어를 잘한다고 얻을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영어로 보자면 가성비 좋은 결과를 낸 것 같다. 누군가 너는 영어를 어쩜 그리 잘하니? 묻는다면 늘 하는 얘기가 있다. 수학 못한다고 아빠가 나를 혼내실 때, 엄마가 나에게 튼튼 영어를 시작시키시며 넌 참 영어 발음이 좋다고 칭찬해 주던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육아 지침서 같은 이야기지만 실제 작용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칭찬은 나라는 고래를 춤추게 했고, 나 역시 그 긍정적인 효과를 우리 아이들에게 계승시키고 싶다. 그 시절, 영어가 그랬다. 지금 이 시대는, 그리고 더 나아가 가능하다면 우리 아이들의 시대에는 어떤 것이 사회적으로도 스스로도 자랑스러워할 만한 요소가 되어 줄까.
4.
내가 속한 사회에 국한된 이야기 일 수도 있지만, 요즘 시대는 개발자들이 각광을 받는 시대이다. 컴퓨터만 조립하고 게임만 하던 친구들이 멀끔하지만 아직 그 옛날의 너드(Nerd) 미를 벗어내지 못하고 적당한 면바지 위에 난방을 풀어헤친 룩으로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닌다. 전기차나 손목 무겁게 워치를 차고 다니는 등 전기에 노예가 되어 이 피지컬/버추얼 사회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얘가 사회에 발은 들일 수 있을까 하던 몇 친구들이 떠올라 조금 격해진 묘사가 되었다.) 결혼도 잘했다. 좋은 시점에 좋은 사람을 만나 예쁜 가정을 꾸리고 강한 T 주제에 프로필에 아이를 향한 꿀 떨어지는 시선이 잘 부각된 아이 안은 사진들이 가득한 모양으로 산다. 이런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 미리 보고 싶은 미래는, 아이들이 좋아할 수 있는 영역 중에서 그래도 미래에 모두가 중요시 여길 부분을 지원해주고 싶다. 그래서 학창 시절 전교 상위권 성적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커보니 생각보다 사회에서 잘 알아주고 적당한 위치에서 시작할 수 있는 영역. (쓰고 보니 욕심 같아 보인다만..) 나의 너드 친구들이 자신의 한계점들을 안정적으로 잘 극복해 가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에 무난한 영역. 쓰다 보니 결국 나는 트렌드를 알고 싶은 것인가 보다. 영어가 그러하고 개발/코딩이 그러하듯 다음 10년에 어떤 영역이 아이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줄까. 금전적인 재산보다도 그런 능력의 유산을 만들어주고 싶다. 이 고민을 충만히 할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이 삶에.
5.
3박 4일의 짧은 여행지는 제주였다. 유년기의 아이 셋을 데리고 비행기 타고, 차를 빌리고, 세끼 식사를 고민하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여행 전날 며칠 간의 부재로 업무 정리를 하는 내게 어지간하면 다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전쟁 잘 치르고 오라던 동료들의 말이 괜한 말은 아닌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정말 행복했다. 앞서 말한 그런 고민들도 남편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고, 제주의 비싸지만 느린 마을 속에서 생각보다 수월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너무 심심하니 지내는가 싶어 마지막날엔 제주스런 곳을 다녀와보자 했는데, 아침 일찍 오른 오름이 너무 아쉬워 오전에만 오름 두 개를 올랐다. 그것도 아이들과 같이. 그 과정이 과연 뭇 이야기하듯 극기훈련 같았던가 돌아보니 꼭 그렇지 않았다. 꽤 상쾌했고, 뿌듯했고 행복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 그러다 보니 살짝 자신감도 생긴다. 사람들이 다들 힘들다고 하고, 나 역시 한껏 겁먹어 있는 영역들에 있어서, 사실은 우리만의 색채를 가지고 살아가도 생각보다 낭만이 있을 것 같은 용기. 그런 것들이 생긴다.
6.
현실로 돌아와 밀린 업무를 하고 일상을 살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대도시의 삶은 이런 시계였지. 맞아. 어딘가 뒤쳐지진 않았을까 조마조마하며 다시 하루를 달린다. 글도 잊는 삶이다. 그러다 문득 뒤돌아본다.
7.
이른 휴가를 다녀왔다. 이 간지럽게 벌써도 움이 터버린 신기루 같은 꿈이 과연 실현이 될지, 그저 이른 여름밤의 꿈으로 흘리 울지 궁금해지는 금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