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때와 말하지 않을 때를 아는 지혜
1.
엄마는 내 이름에 운이 있다고 했다.
유난히도 어딘가 응모를 하거나 신청을 하거나 하면 나만 당첨이 된다는 것이다. 유난히도 그랬다. 언젠가도 라디오 사연에 당첨되기도 하고, 지자체에서 하는 크고 작은 행사에 내가 제출한 제작물이 당첨되기도 했다. 어릴 적 나는 친구들과 “넌 나중에 아기 낳으면 무슨 이름으로 짓고 싶니?” 하는 이름에 내 이름을 늘 꼽기도 했다. 왜. 서양권에서는 주니어 개념도 있지 않는가. 엄마는 어릴 적 내게 넌 늘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뭐든 자신 있게 해 보라고 종용했고, 실제로 그렇게 당첨되는 일을 몇몇 겪어가며 나는 스스로 믿기 시작했다. 진짜 그런 건지 아니면 엄마의 바람이었던 것 인진 모르겠으나 나는 늘 운이 좋았다. 한참 크고 나서, 중학생 무렵이었다. 엄마는 또 내게 너는 운이 늘 좋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시절 내게 조금 연결 짓기 어려운 개념이었던 것 같다. 운이 좋은 것은 자칫 교만해질 수 있고, 스스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에 늘 겸손해야 한다고. 그래서 말 잘 듣는 나는 받은 복이 많으니 겸손해야 한다는 굴레 속에 살았다.
사실 다소 만들어진 개념도 있었지 싶다. 그 당시 지자체에 응모하는 초딩이 극히 드물었을뿐더러, 청취율이 저조한 시간대의 방송이기도 했고, 약간의 버프가 있긴 했다. 또 아직 미성숙했던 내게 겸손이란 또 다른 교만이 되어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는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운이란 본디 내가 달라고 해서 받은 게 아니니, 이것은 굳이 내가 겸손할 필요도 없는데 내가 겸손까지 해주니 이제 세상이 내게 더 부어 줘야 하는 것 아니겠냐는 개똥논리이자 어찌 보면 지극히 인간 본성적인 욕심에 근거한 논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어났던 것 같다. 엄마의 기질만으로 구성되지 않았던 나라는 유전자는 엄마의 바람대로 크지 않았던 것이다.
2.
한동안 힘들었다. 나의 청소년기는 과욕의 통제 욕구와 관심에의 집착으로 인해 한 친구를 왕따 시키려다 결국 내가 왕따를 당하던 이야기로 점철되었고, 그나마 공부라도 결과가 나쁘지 않아 이름난 대학에 들어갔으나, 나의 청년기는 인정욕구의 과잉으로 매출 1위, 실적 1위, 최연소 팀장제안 등의 실적을 이뤘으나 나쁜 연애와 정신적인 시련 등으로 인한 공황상태 등을 겪었다. 일련의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 내가 신에게 버려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3.
눈을 감고 지난날을 회고하니 그랬다. 지금 나의 남편이 이런 나의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전생의 이야기를 듣는 듯 여길 테다. (물론 다 아는 이야기긴 하지만.) 그만큼 그 시련의 시간으로부터 나는 꽤 멀다. 안정적이고 평범하고 평안하다. 워킹맘 일상 속 크고 작은 변수들이 가득하지만 꽤 이 삶을 감사하며 넉넉히 지내고 있다. 어느 날 회사 동료가 내게 "너 애들 셋 키우면서 일하는 거, 힘든 티 내지 마"라는 조언 아닌 조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전혀 타격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대를 사는 아이 셋 워킹맘은 헤르미온느의 시간 마법이 필요하며, 저글링 능력 탑재와 수많은 부캐들이 필요하기에 꽤나 부지런을 떨며 살아야 하는 것이 맞긴 하다. 살면서 흘러나오는 신음이야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내 내면에서 부정적인 고단함으로 여겨지는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에 타격감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능력치는 내 유년시절에 생겼지 싶다. 여러 사건 사고들로 나의 한계를 깨는 여러 경험이 있었고, 그 경험들이 기반이 되어 지금의 생이보다 푸르고 평온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갈등과 문제 상황에 대하여 내가 제어하고 싶거나 이겨내고 싶은 욕심보단 보다 잠잠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며, 고된 파도에 대하여 신의 섭리 아래 순종과 겸손 외에는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안다. 물론 아직 종종 흔들리고 아리고 슬프고 화를 내지만, 그 중심이 흔들리진 않는다. 감사만 있다.
4.
엄마의 말은 내게 꽤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나에 대한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정말 걱정스런 우려 외에는 그저 들어주기만 한다. 분석적이고 약간의 예지적인 혜안이 있는 엄마에게 어릴 적 나에 대한 정의와 통찰력 깊은 지혜의 말 같이, 지금의 난제들에 대해 엄마의 견해를 듣고 싶은 날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철저하게 아낀다. 사춘기의 어느 날 엄마가 내게 예언하듯 하는 말 때문에 내가 그 기준 맞추느라고 너무 스트레스라며 울부짖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혹은 엄마 역시 생의 날이 더하면서 침묵이 되려 지혜임을 깨달으셨기 때문이실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엄마의 지혜는 잠잠해졌고, 기도는 늘었다. 지금의 나는 이러한 생의 모양이 꽤나 마음에 든다. 유년기 엄마의 말은 내게 예고편과도 같은 역할을 했기에 내가 복이 많은 아이며, 그로 인해 꽤 일찍부터 겸손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사건들이 있었던 것이라고 의식하며 힘든 시기를 지내 보냈고, 체화된 지혜를 생으로 살아가는 지금은 엄마의 잠잠한 지혜와 우렁찬 기도는 내가 직접 생을 살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되어주고 신의 섭리에 대한 겸손이 무엇인지를 생으로 직접 부딪혀 배우는 교과 과정이 되도록 돕는다. 나는 꼭 엄마와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나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사는 지혜를, 신을 믿는 개념을, 생을 따뜻하고 감사하며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세를 가르치는 지혜를 꼭 배우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는 오늘도 살아내 간다. AI와 수많은 가속화된 변화들 속 어떤 주식이 뜰지, 어느 부동산이 각광을 받을지, 어떤 직업이 우대받을지는 몰라도 그런 외형 조건의 변수를 극복할만한 귀한 지혜를 꼭 알려주고 싶다.
5.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니라. - 전도서 5:18-20
: 사람의 생은 수고한다고 수고의 값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수고 중에 낙을 누리는 것은 신의 선물이다. 이 개념을 깨우치지 못한 사람은 수고 끝에 허무나 해악이 결과로 다가오는 날을 견디지 못한다.
: 재물과 부요는 100% 사람의 노력과 개인의 능력치의 총합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이를 모르는 경우 열심히 노력해도 월급쟁이인 나와 쉽게 부를 축척한 베짱이의 간극 사이에서 배앓이하느라 생을 낭비하게 된다.
: 생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않는 이유는 이미 지금 생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신의 사랑은 현생에서 고난의 길을 걸어서 덕을 쌓으면 내세에서 보답해 주겠다는 단편적인 변태적 성향에서 멈추지 않는다. 신은 이미 생의 현장에서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도 영이 이미 천국을 경험하고 사는 원리를 선물하고자 하며, 이 것이 내세에서는 더욱 확장되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 신의 사랑일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