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하지 못하는 우연이 삶을 가꾸는 풍요에 대하여
1.
우리 집 아이 중 하나는 꽤나 감각적이다. 확실히 다른 아이들의 동월령기간보다 감각하고 사고하는 깊이와 정도, 범위가 다르다. 그래서인지, 이 아이의 화려한 수사여구가 가득한 말들과 생각에 감탄하기도 하고, 차원이 다른 생떼와 화로 인해 마음이 다치기도 한다.
2.
아이 셋을 키우다 보면 각종 용품들을 내가 직접 구매하지 않은 경우들이 종종 있다. 특히 한철 사용하고 마는 제품들일 경우, 시즌성 용품일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물려 입거나 선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올해 아이들의 장화가 그러했다. 어쩌다 보니 세 명의 장화 모두 물려받거나 선물 받은 것 들인데, 공교롭게도 둘은 오리 캐릭터가 그려져 있고, 하나는 브랜드 로고만 잔뜩이다. 그리고 그 브랜드 장화가 그 아이의 장화이다. 사실 어딜 가든 지하로 연결된 굴커넥션의 시대에 살면서 아이들이 장화를 신고 우비를 입고 우산을 쓰고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을 일이 점점 더 줄어들었다. 물려받은 장마용품들도 거의 한 두 번 사용했다 말았다 하는 경우들이었다. 어른들이야 편리해진 세상이라지만, 아이들 입장에선 비 오는 날이라는 것은 더욱 특별한 날이 되었다. 내 개인적인 체감으로 보면 실제 비 오는 날도 나의 어릴 적과 비교해 보면 꽤 많이 줄어들기도 했을뿐더러, 지하연결시대에 사는 우리 아이들에게 '우구(비용품)'를 사용할 만큼의 강한 비를 지상에서 맞을 일이 없다. 거기에 우리 집의 경우 '애 셋 = 우산 세 세트'이기에 부모의 손이 너무 번거로워서 잘 챙기게 되지 않는다. 또한 하원 후 어딘가서 뛰어놀려면 장화가 불편하기에 장화도 어지간하면 안신기고 싶다. 이러한 실정이다 보니, 아이들에게 비 오는 날은 일단 장화 신고 우산 들고 싶다고 조르기부터 시작하는 날이다. 원래 별거 아닌 것도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듯 어쩌다 보니 아이들에게 장화와 우산, 우비는 특별하고 소중한 물건이다. (막상 우산 들고나갔는데 비가 적게 오면 당연히 부모는 우산걸이대가 되긴 하지만..) 이런 배경인 탓에 아이들은 디자인을 막론하고 자신의 사이즈에 맞는 것이라면 좋아라 하고 가지고 나갔다. 하지만 어젠 갑자기 이 감각적인 아이가 처음으로 자기 장화를 던졌다. 오리그림이 없어서다. 자신만 오리 그림이 없어서 다른 장화를 신겠노라고 생떼가 도졌다.
3.
위기는 꼭 거창하고 드라마 같은 상황으로 찾아오지는 않는 것 같다. 가끔 아주 평범하고 아주 하찮은 것들이 발화점이 되어 폭풍을 일으킨다. 나비 한 마리의 그 날개의 무게가 감히 얼마나 무겁다고 어느 날의 내 생명을 앗아갈지도 모를 만큼의 힘을 갖는다니. 아이러니처럼 위기는 찾아온다. 이 아침이 그랬다. 아이 셋의 발달과정이 다르고, 기질도 다르고, 성향도 다르다. 내가 함께해 주는 시간도 다르고 퀄리티도 다르고 그들이 요구하는 정도도 다르다. 거기에 나의 신체 컨디션과 회사 업무의 양과 질, 남편의 기분과 육아의 참여도 등 여러 가지 변수들이 더해지면 꽤 복잡한 그림을 구성한다. 대부분의 날은 한 아이로 받은 스트레스를 다른 아이의 애교로 녹이기도,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아이들이 스스로 뭔가 해내는 모습을 보며 워킹맘 슬하의 아이로 크느라 고생이라며 드는 짠한 마음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얼기설기 얽힌 관계들과 나의 정성과 열심, 남편의 사랑, 그리고 가끔씩 갑자기 보내주는 엄마의 위로금이나 어머님의 반찬, 아이들 맡기고 좀 쉬어라 하는 관심 등이 지난 7년을 채웠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수많은 요소로도 안 덮어지는 위기의 싹이 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지난 한 달 유난히도 짓궂게 늘어난 그 아이의 떼와, 그냥 하나 살까 싶으면서도 옆에 이미도 미어터질 것 같은 신발장이 하나만 더 사면 혼쭐을 내겠다고 시비 거는 것 같은 기분. 그리고 무엇을 사준다 한들 또 변덕 부릴 아이에 대한 편견, 우는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장화를 들고 억지로 카시트 벨트를 채우는 스스로를 보며 들어오는 자괴감과, 원에 가는 길 내내 울며 부모를 향해 화를 내며 하찮은 독설을 뱉어내는 아이를 보며 드는 짠한 마음. 그 와중에 그 하찮은 말이 갑자기 화살로 받아 기어코 스스로 상처를 내는 내 마음. 모든 것이 애초에 내가 아이 셋을 담을 그릇이나 되었나? 하며 궁극의 버뮤다를 향해가는 그 순간. 그날이었다. 위기.
원에 들어가는 길에 겨우 아이를 달래며, 그럼 너의 장화에도 오리 스티커를 사서 붙이기로 하자. 네가 좋아하는 만큼 잔뜩 붙여줄게 건넨 말 한마디에 아이가 웃는다. 이토록 얄팍한 내 꾀로 달래져 주는 아이를 보고 어쩜 나는 왜 그 깊은 지옥의 케베로스를 소환하려고 했었을까 싶다가도 오늘마저 지각할 수는 없어 회사를 향해 달렸다.
모든 엄마들은 자식걱정이 백그라운드 프로그램으로 계속 돌고 있다. 단축근무를 하고 있어 하루 일과가 매우 바쁜 나 역시 일하는 종종 아이들 걱정을 한다. 늘 긴장과 걱정으로 뇌를 풀가동한 결과 매일 오후 아이들과 하원하고 1-2시간은 엄마랑 놀이하는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들어간다. 대체로 아이들은 엄마와 노는 시간을 좋아한다. 매일 가는 산이여도 새로운 곤충과 풀을 보고 재밌어한다. 그럼 보통 아침의 짜증이나 약속 따위는 잊기 마련이다. 오히려 지금 당장 어디서 더 놀고 싶다, 비타민 사탕 하나 더 달라 이런 요구사항이 더 익숙하다. 하지만 그날은 하원길에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 엄마 내 오리스티커는 구했어? 미안하게도 그날 하원 후 어딜 가서 놀까 고민은 했지만 오리스티커 따위의 생각은 1초도 할애하지 못했다. 그럼, 우리 이따 같이 사러 가자~ 하고서는 아이들을 차에 태워 집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장화에 붙일만한 방수 스티커가, 그것도 오리모양의 스티커가 어디 있을까. 한참 고민하며 달리는 동안 아이는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를 그대로 유모차에 태워 다이소에 도착했다. 어린아이 셋을 데리고 이동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다른 지점에 비해 작은 크기인 우리 집 앞 다이소에 오리 스티커가 정말 없을 것 같긴 했지만 여기에 없다고 해서 다른 곳을 찾아갈 만한 여력이 있진 않았다. 아이들과 웃으며 다이소에 도착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여기에 없어서 아이가 혹시라도 실망하고 짜증을 낸다면 거친 화가 흘러나올 것 같은 폭풍 같은 마음 상태였다. 스티커 코너에 갔는데 역시나 없다. 마스킹 테이프도, 어느 곳에도 안보였다. 역시나. 말이 오리지 요즘 같은 캐릭터 시대에 오리 스티커는 정말 찾기가 쉽지 않다. 그냥 아무거나 사서 우겨보거나 매직으로 그림을 그려주거나 그것도 싫다면 그냥 하나 사자 싶었는데 다른 아이가 나를 부른다. 엄마! 여기 있다 오리! 빅 스티커다. 오리 빅 스티커. 리무버블에 필름 인쇄라 적당한 방수까지 되는. 나 참. 이게 있다 여기에.
4.
신의 개입이라고 생각한다. 오리 스티커가 신의 은총이라고 여기 기다니 아주 극성맞은 신자로구만! 싶을 수도 있지만, 사실 나의 생 대부분에 이런 신의 개입이 있다. 우연과 운. 나는 사실 다른 많은 생 들에도 이러한 개입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연과 운은 늘 존재했다. 논리와 과학적 예측을 기반으로 사는 이 시대에서도 운과 우연은 늘 존재한다. 심지어 바라기도 한다. 우리 팀 열두 명 중 열한 명은 모두 로또나 복권을 기회 될 때마다 사거나 사본 경험이라도 있다. 1등을 바라며 숫자를 맞춰보지만 안타깝게 아직 한 명도 없다. 그런데 종종 5천 원 복권에 당첨되거나 숫자 한두 개가 맞는 경우가 있다. 내가 보기엔 그것도 기분 좋을만한 일인 것 같은데, 다시 그 돈으로 복권을 사거나 금세 아이스크림 등을 사 먹으러 녹아버린다. 그 돈을 활용하는 거야 당연히 개인의 선택이지만 당첨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희미한 찰나로 사라져 버리는 게 안타깝다. 생은 직선적이다. 어느 순간도 결코 두 번을 살 수 없다. 데자뷔를 종종 느끼는 나지만 그 기시감이 있다고 해서 특정 순간을 두세 번 반복해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직선으로 흐르는 화살 같은 순간에 내가 당첨이 되었다. 이 사실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충분히 기뻐할 만하고, 내가 노력하는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이렇게 우연하고 운의 영역에서 내게 혜택이 돌아왔다면 충분히 대단한 일이다. (물론 easy come easy go의 원리에 입각해서 쉽게 사라지는 환영 같은 효과일 수도 있지만) 숫자와 확률적으로 계산해서 2,314번째 구매자가 당첨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를 계산해 본다 하더라도 그 2,314번째 구매자가 내가 돼야 할 이유나 필연적인 과학 원리는 없는 것이다. 우연과 운이다. 사람들은 요즘 그걸 너무 쉽고 가볍게 여긴다. 그토록 갈망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5.
20대 나는 꽤나 삶이 복잡했다. 그 시험의 기간 동안 꽤나 많은 것을 배웠고 삶의 철학 수업의 개론정도는 들어 두었던 것 같다. 그 수업이 기반이 되어 30대 나의 삶 속에서는 대체로 그 삶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그 레슨 중 하나가 '신의 개입의 순간을 가능하면 많이 느끼고 누리자'이다. 이 자세는 결국 내 생이 나의 노동의 조합, 딱 그 그릇만큼의 함수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타인과의 상호 관계로 인한 변수, 전혀 관계되지 않는 매개변수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너머에 인간과 과학이 도저히 설명 못하는 그 영역쯤에 신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도와주고, 생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효과가 생긴다. 우연의 순간 내게 아주 작은 소소한 행운 같은 일이 찾아온다면 신에게 내가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 혹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도 느낄 수 있는 흔적이 된다. 이 원리는 어떠한 작고 소소한 일상 중 기분 전환에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위기의 순간에 내가 혼자 이 거센 파도 같은 세상 속을 헤쳐나가며 노를 저어 가는 것은 아니라는 위로와 응원이 된다. 아이 셋을 키우며 일을 하는 내게 삶은 종종 벅찬 날을 물어다 주기도 한다. 종종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파도가 불과 100 m 앞에 닥쳐오는 순간이 있다. 내 뒤에는 아이 셋이 있고 우리 부부는 이미 거친 항해를 지속해 온 탓에 지쳐있다. 영화를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숨 가쁘게 찾아오는 잽들과 같은 긴장들로 조마조마한. 그런데 이 파도는 그런 게 아니다. 극도의 공포라던가 그저 초월적인 어떠한 현상, 사건, 사고, 위기이다. 그런 위기들에 대게 주인공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있다. stay and stare.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다 같은 맥락이다. 더 이상의 노력과 바둥거림이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 신이 필요한 순간. 더는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신이 저 파도 사이에 자신의 손을 넣어 길을 뚫어 나의 살길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땅으로 나를 꺼트려서 새로운 돌파구를 내어주지 않는다면. 혹은 그 어떤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나를 구해내지 않는다면 지금을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이 있다. 그때 종종 신을 찾게 된다. 간절히 바라게 된다. 재밌는 것은 이런 상황을 한번 겪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신을 간절히 찾아본 경험이 있고 그로 인해 구원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아는 한) 공통적으로 신의 개입의 흔적을 좀 더 잘 찾는다는 것이다. 작은 일상의 우연이 그저 랜덤 하게 일어나는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일상 속 무수한 신의 개입과 신의 사랑의 흔적일 수도 있다는 것. 그 철학이 바탕이 되면 생의 색채가 좀 더 입체적이여진다. 인간이 낼 수 있는 생의 색채보다 다른 차원의 입체감의 색이 더해진다.
내겐 다이소에서 찾은 오리 스티커가 그랬다.
오리 스티커를 찾고도 아이는 늦은 낮잠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늦은 밤 다되어서 깨어난 아이는 오리 장화를 맘에 들어했지만 유난히 좋아하지도 않았고 딱히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냥 엄마가 내 약속을 지켰구나 하는 정도의 만족감 정도였던 것 같다. (자신이 맘에 든 퀄리티였다면 아마 장화를 부둥켜안고 온갖 미사여구를 함박으로 쏟아냈을 아이다.) 늦은 저녁에 일어난 아이는 역시나 나의 체력 고갈 한계선인 9시 반을 훨씬 뛰어넘어 11시 반쯤에야 잠이 들었다. 피곤에 두통까지 일어났지만 이 작은 한차례의 소동으로 내 마음은 꽤 평안했다. 그래 신이 나를 보고 있다. 우리 가정을 보고 있다. 이 작고 사소한 정서와 멘탈도 관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으며, 글로 표현하기 부끄러운 치사하고 보다 생계에 허덕이는 순간들에도 찾아와 관여하는 그 순간들로 인해, 오늘을 평안히 보낸다. 솔루션과 해결책, 답과 논리를 채근하며 AI를 다그치는 나의 일상과 달리 부드러운 그 신의 관심이 따듯한 호흡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