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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한 행위에 대한 제고

by Grace Hanne Lee

1.

어떻게든 생산적이어야 하는 강박이 있는 편이다. 아이 셋 워킹맘에게 계속 백그라운드로 돌아가는 섹터들이 여럿이다. 회사, 일, 미래, 기타 등등의 염려들이다. 얼마 전 릴스에 와닿는 표현이 있었는데, 고기능 번아웃의 증세들과 비슷한 것들이 많다. 휴식시간이 오면 숏츠 등으로 새로운 자극을 채우고, 무슨 일이 갑자기 생겨도 긴급하게 여기며 일에 빠른 반응을 한다. 갑자기 진지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멀쩡히 잘 지내다가 울컥하는 (눈물이 나진 않는다고 해도.)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2.

눈을 뜨면 기계적으로 조깅을 하려고 하는 편이고, 짧은 조깅 후에는 빠른 샤워 후 화장 없이 선크림만 바르고 출근한다. 남들보다 조금 짧은 근무시간 중에, 혹 태만으로 비쳐 자리가 빼앗겨버리면 어쩌나 하는 우려 등으로 가열된 업무를 마치고, 정각에 퇴근해서 10분 만에 아이들을 맡기는 기관에 도착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한 시간 남짓 야외활동을 꼭 한 후에 집에 와서 저녁 준비와 씻기기, 먹이기, 책 읽기, 재우기를 마친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꼭 잠을 자려고 하는 편인데 종종 미래 먹거리나 자존감을 위한 활동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어서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러나 누적된 피로 등으로 그런 날들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젠 2주에 한번 서재 컴퓨터 앞에 앉을까 한다. 생산성을 위해 디바이스들을 조금씩 개선시켜서 작업에 최적한 컨디션을 만들었지만, 그 자리 앉기 위한 신체 혹은 정신이 최적화되지 못하였다. 이런 압박감은 몇 개월째 절전 모드로 보드를 낭비하고 있는 맥북이 대신해주고 있다.



3.

내 개인적인 이유인지, 시대의 흐름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생산적인 활동에 대해 긴장하고 있다. 몇 년 새 '생산'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재조명되었다. generative AI의 등장과 함께, 생산이라는 단어가 일상 언어에 자주 등장한다. 기술 분야에서 급부상된 이 단어는 이제 일상 다양한 분야에도 범람하여 재통용된다. 생산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이러하다.

자연물에 인력을 가하여 사람의 욕망을 총족시킬 수 있는 재화를 만들어 내거나 증가시키는 일. 생물이 생활과정에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

생산이라는 단어의 정의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생존 영역과 유관한 작업이다. 특정 인구나 세대가 아니고, 인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생물 단위까지 원초적인 접근으로 내려간다. 아주 지극히 자연의 기초된 활동 중 하나를 일컫는 어휘에 대하여, AI- 인간이 '생산'해 놓은 창작물에게 다시 그 권위가 주어진다. 이 자연의 위계 체계를 기반으로 인류가 여기까지 지내왔는데, 이제 AI라는 창작물(創作物)에게 가상의 '생물'의 권위를 부여하고 그 행위 역시 이 '물(物)'에게 권속 시키는 아주 변태적인 구조가 일상 속 반복을 거듭하며 생태계에 침투하고 있다.



4.

물론 우려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지만, 나 역시 일상 속 많은 순간에 AI를 사용한다. 글을 쓰게 된 계기도 AI 사용이 불가피하며 뇌를 사용하는 인류의 기초적인 활동과 훈련을 멈추고 싶지 않아서 시작한 것도 있다. 편리하다. 스마트폰의 시대에 진입할 때 보다도 더 편리하다. 스마트폰은 벽돌 같은 디바이스를 손에 이고 지고 다니면서 그 특유의 물성적 불편감이 있어서 장벽이 있었다고 하지만, AI는 인생 속 침투에 용이한 모든 환경이 갖춰진 셈이었다. 다달이 나가는 구독료도 새롭지 않을뿐더러, 포털 앱 대신 생산성 AI 앱을 사용하면 열어 사용하면 되고, 이미 사용 중인 도구들의 개발사들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AI를 갖다 붙인 기능을 선보이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저 나 스스로만 Searcher에서 Prompter가 되면 되는 것이다. 검색을 고민하며 자료들 상간의 논리 구조와 인과 관계들을 밝히려는 두뇌의 역할만 기꺼운 마음으로 AI에 넘겨주고 지시만 하면 되는 구조가 되어간다. 컴퓨터의 등장에 타이핑이라는 물리적 훈련도 필요 없는 수월한 프리패스이다. 물론 새로운 역량이 추가되긴 한다. 프롬프팅의 능력이야 어느 정도 수준의 대중들은 AI와의 약간의 시간을 보내면 금세 방법을 찾을 것 같지만, 그 hallusination- 환각에 대한 검증, 분별, 제어정도의 능력을 새롭게 요하긴 한다. 단순한 사실 명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몇 번의 검증 작업을 하는 불편함 정도는 사실 AI의 자가학습 능력 등으로 인해 금세 해갈될 테지만, 지금은 hallusination으로 시작된 이 추론 증상이 점점 인류가 따라잡지 못하는 가상의 진리로 잡혀버릴 새로운 감옥 속에서 빠져나올 개인의 자생력 혹은 인류의 사고 능력이 중요할 것이다. 조개껍질 따위를 부수어 가치를 증명하다, 금과 같은 광물을 사용하다가 이젠 그 가치를 보이지도 않는 코인에 기대는 인류의 가상성은, 마치 물질계의 한계를 극복한 듯 보이지만, 새로운 부동산에 더 무거운 족쇄를 얹는 듯하다. 자고로 움직이지 않는 자산이어야 할 부동산(不動産)은 가상공간에서 당연히 존재할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개념의 희소성을 스스로 창조하여 값이 매겨지고, 희소성에 대한 인류의 해방을 실현시킬 것 같지만 새로운 굴레를 씌우고 있다. 인간이란 여전한 한계를 걷는가 자문해 본다.



5.

이런 새로운 시대에 나는 75세의 내 일상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자녀들도 어느 정도 손을 벗어난 완벽한 노년의 삶. 그러나 강제적으로 연장된 기대수명을 보면 아직 생의 마감까지 한참이나 남은 시기의 나. 그 시기의 나는 어떤 활동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날의 나는 어떤 인간의 기본 활동을 하며, 다시 말해 어떤 생산을 하며 살고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다 보니 문득, 그 시대에는 인류가 '생산'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까 궁금해졌다. SF 영화는 인간의 생물학적 생산에 대해서도 이제 인공 수정을 넘어 인공 임신을 상상하여 알과 같은 형태의 임의의 태를 개발하고 아이를 기르는 상상도 한다. 물론 사회 체제에 따라 다르지만, 내가 속한 사회를 기준으로 보면 다양한 생산 활동들을 바탕으로 개인의 생산력에 대한 증명에 의거하여 희소가치를 차등 배분하고, 그로 인해 가장 기초적인 의식주 해결은 물론이거니와 차세대 생산력 양성 및 개인의 가치 증명과 인정으로 인한 고귀한 가치 충족까지 일어나고 있는 게 요즘 시대의 생산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75세에 이 문장은 과연 얼마나 효력이 있을까? 불쾌할 정도로 빠른 AI의 발전과 아직 정의되지 않은 미래의 또 다른 어떤 기술의 혁신은 그 정서적 배척을 우회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인류가 꺼려하거나 그 한계를 극복해보지 못한 영역에서 자신의 터전을 잡았다. 이 효과로 인류는 새로운 편리함과 도파민을 얻는다. 동시에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를 기꺼이 포기해 간다. 이 피로한 영역도 사실 인간을 구성하는 '컴포넌츠' 요소인데도 말이다.



6.

하염없이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는 내 맥북에 막내 아이의 흔적이 닿았다. 글을 쓰려고 브런치를 열어보니, 아이가 키보드로 두드렸던 흔적이 제목에 남아 임시저장 된 글로 불려 왔다. 점심시간 짬을 내서 글을 쓰는 중에 저 무용한 단어 조합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그러다 문득 기분이 묘해졌다. 과열된 생산성의 한복판에 무의미한 두들김의 흔적이 새삼스러운 의미로 다가왔다. 무용하다고 생각되는 이 문자의 연속이 어쩌면 나의 75세에 인류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묘한 느낌을 받아보았다. 묘한 컬트적인 느낌을 닫아놓으며 다시 생산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살기 위해 노트북을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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