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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mula 1

아주 오랜만에 적어보는 지극히 감각적인 리뷰

by Grace Hanne Lee

오랜만이었다. 몰입의 순간. 이상하게 글로 쓰기 시작한 이 순간부터 그 흥분과 침착하고 개운한 말초신경들이 다 멋이 없어진다. 형언하기 힘든 순간. 그래서 그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태어났고 세계 문호들이 생겨났나보다. 도대체가 말이라는 이 투박하고 멋없는 것으로부터 이 극도의 호르몬과 이성과 흥분과 평온함의 조합을, 이 가벼운 몸과 머리와 뜨겁고 차가운 이 순간을 형언할 수가 없어서.


2.

실패는 감칠맛을 더한다. 이뤄내는 어떠한 경지에 찾아올 그 초월적인 순간. 스토리 텔링을 기반으로 만들어내는 이 간접 체험 시공간에서 그 상태의 미믹의 순간에서도 맛을 느낀다. 진품의 생으로 그 실패를 살아내고 어떠한 고점을 이루었을 때 그 멎는 호흡과 소음과 소란속 고요와 평안. 그 이후 찾아오는 모든 움직임은 가볍고 새롭다. 타이핑을 하는 이 행위와 동작마저도 깃털같고 요란하면서도 조용하다. 성공의 환희는 그 수많은 실패와 시간과 역사를 기반으로 더욱 다채로워진다. 그리고 그 환희는 총량이 있어, 소란하고 급격하게 뿜어내버릴수록 흩어져 사라져버린다. 새로운 승리를 추구할 수도, 혹은 고스란히 자신의 방으로 가져와 수많은 복기 속에 우려내어 누릴 수도 있다. 요리하는 자의 입맛인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와 터질것같은 고요를 잠잠하게 곱씹어가며 도심 한복판의 혼잡 사이를 걷는 과정 중의 내 손끝과 발끝의 태도와 근육, 신경을 느껴가며 한 카페에 찾아와 덤블도어가 기억을 하나씩 뽑아내듯 가느다란 실같은 '언어'로 이 상태를 형용하는 중이다. 나 역시 꽤나 초감각적인 사람인 듯 싶은데, 몰입과 공감의 끝에서 새로운 생을 살다 온 기분을 느끼고, 이 상태에 이르고 나면 새로운 육체에 깃든 듯 똑같은 몸의 감각도 새로워진다. 카페에 앉아 짙고 평이한 커피 향 사이로 여름 음료를 제조하는 베리류의 잼 향 등이 기분나쁘게 스쳐간다.


3.

생을 걸 만한 레이스가 보편적인 인류에게 있을까? AI의 가속적이고 이젠 자발적, 자기 학습적이기 까지 한 발전이 거듭되는 시대 속에서 생을 걸만큼 아찔하게 한계를 극복하며 집착할만한 레이스가 보편적인 인생에 있을까? 수많은 수식과 경험을 조합한 계산식인 포뮬라. 가장 사치스럽고 드라마틱한 스포츠의 경기 이름이 영아들의 생의 기초가 되는 분유의 영어명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와도 같으면서도 철학적인 good match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레이싱 경기를, 산업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껏하는 영화 몇 편으로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치스럽다. 물리적 값어치로서의 사치 외에도 그 경기 하나에 쏟는 생의 시간과 에너지와 열정과 정신이 그러하다. 오랜만에 탄탄하게 만든 시나리오와 한스 짐머의 음악과 기타 여러 'fomula'덕분에 레이싱 혹은 여타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도파민을, 그 정서를 얼핏이나마 엿보았다. 수 많은 변수와 긴장, 위기와 그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순간들. 스크린 너머 계속 맡게되는 가상의 땀냄새와 있을 것 같은 특유의 향수 냄새들, 비누 향들, 매연, 비 냄새, 트랙 위를 조깅하며 헤이스가 맡았을 고무 눌어있는 아스팔트의 향 등이 맴돈다. 그 극한과 실패를 딛고 목숨을 걸어 이겨낸 그 위의 화려한 환호 말고 자신 안의 승리, 그 천국의 순간을 경험하는 그 맛. 보통 평범한 시민은 과연 이 정점의 순간을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 매일같이 회사에서 소문과 정치와 급여 인상을 놓고 겨루며 이 쾌감과 고요의 정점을 누릴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일반인이 그 고요를 느끼자고 레이스를 펼칠수는 없는 일이다. 목숨을 걸고 규정을 어겨가며 모험을 할 수는 없을 일이다. 아 하지만 이 넘치는 감각의 향연을 이렇게 간접적으로 영화를 보아가며 느끼기엔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일 뿐더러, 하루종일 릴스만 넘기다가 AI에 치여, 젊은이들에 치여, 자본에 치여 소란속에 내 걱정, 자식걱정, 손주걱정을 끝으로 생을 마감하기엔 정말 비통할 일일테다. 사람마다 주어진 것이 다를텐데, 이 걸 느껴버린 내가 그리 끝나기엔 정말 안타까울 일이다.


4.

점점 현실로 돌아온다. 모터 터지는 소리들이 이제 제법 귀에서 빠져나간다. 차로부터 좀 떨어진 거리에 카페에 앉아 글을 쓰며 이제 돌아가는 길에 이 장마 시기에 비라도 오면 안될텐데, 하는 걱정 따위로 돌아온다. 생은 물론 이 땅에 발을 대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현실은 중요하다. 오늘의 생은 중요하다. 헤이스 역시 두번의 이혼과 결혼 무효 등의 현실이었을테니. 경주마는 달릴 길밖에 모르기 때문에.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막말로 나의 자녀에게 헤이스의 아버지가 한 말과 동일한 말을 할 수 있을까? put your head down and just drive.


5.

생과 드라마의 경계 사이에 날아가는 순간을 나 역시 경험해보고 싶다. 어디선가 자식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은, 본인 스스로가 자식들이 살았으면 하는 삶을 실제 살아내며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좀더 멋드러진 표현이었던 것 같은데, 하원시간이 다가와 초조해져가는 손과 뇌는 그럴듯한 문장으로 복기해내지 못한다. 헤이스처럼 도파민과 경지의 고요를 위해 일상을 포기하라는 말을 해줄수는 없다. 그처럼 차를 몰기도 싫다. 하지만 분명 나의 레이스는 있을 것이다. 분명 타인의 소리와 허상의 목소리들이 시끄러운 소음이 되는 경기가 있을 것이다. 생의 마지막 숨까지 그 길을 걸어보고싶다. 그 여자 엔지니어가 증명하기 위해 달리고, 마지막에 결국 hell of car를 만들어내듯. 그 경기를 꿈꿔보고 걸어가본다. 뭔가 보이진 않아도 이미 그 길에 있다고 믿어보며. 누군가 내게 왜 이걸 하냐고 묻는다면 헤이스처럼 아주 오랜 pause 끝에 그 고요를 너무 갈망해서라고 말할 정도로 부끄럽기도 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그 걸 꿈꿨다기엔 30년 이상 헤메이던 오랜 시절이 창피하기도 할 수도 있지만. 그 천국을 기대하고 있다면 이미 그 경기를 시작했음이 아닐런지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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