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발견한 부끄러움에 대하여
회사에서 울었다.
주니어 시절엔 많이도 애달파 봤던 것 같다. 삶을 뾰족이 살아야 하는 내 욕심도 있겠지만 사실 돌아보면 대부분의 것이 나의 한계로 인한 것이다. 이상에 도달하기엔 한없이 짧은 나의 팔과 다리로 인해 허우적거리다 공중에 울분에 가까운 화를 내곤 했던 것이었다. 난 체하기 좋아하는 성격인 탓에 왜 다들 꿈 없이 사는가, 당신들은 이걸로 정말 만족하는가, 이게 다 인 게 맞는 것인가?를 외쳐가며 구조적 한계와 동료들의 게으름, 무지 등에 정면으로 호소하고 대치했다. 그래서 애달프고 울고 불고 하고 나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지게 되었다. 큰 바위를 아주 조금 움직였던 것이다. 나는 그게 대단한 힘이라고 생각했고 의미롭다고 여겼다. 그 만족으로 그다음에도 나의 영혼을 갈아 넣어서 성장을 호소했다. 그게 나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신입 시절 나는 그렇게 회사에서 울고불고 몸부림치던 것이, 매너리즘에 빠진 우매한 조직을 움직일 수 있는 동력쯤이라고 생각했고, 몇 년이 지나고 나서는 사실 그 과정에서 내가 성장하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 하지만 이번, 실로 오랜만에 회사에서 갈등 속에 답답하여 분통 터진 탓으로 울어버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열정이라고 착각했던 이 구조에 대한 갑갑함, 꽉 막힌 동료에 대한 답답함은 울분과 호소로 극복하는 게 답은 아니었다. 좀 더 논리적이고, 상대를 정말 움직일만한 대화와 인사이트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 생각에 다다르니 회사에서 운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그전까지는 울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내가 이만큼 열심이고 울린 저 사람들이 너무나 생각이 게으른 사람들임을 반증했던 울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으로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마주했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핑계 댈 곳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전히 상대는 답답하고 게으르고 무례했다. 하지만 첫째로 그것을 내 울분을 양분 삼아 개선될 것은 아니었다. 둘째로 그렇게 내 에너지를 소비시켜할 만큼 가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 사람의 굳은 생각과 게으름은 그 나름의 인생의 모양 양산을 기반으로 굳혀진 것이었다. 단편적으로 회사에서의 모습만으로 치부하여 그를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었다.
회사일에 너무 감정 쏟지 말라는 것은 만고 진리의 말이지만, 일반적으로도 쉽지 않은 말이기도 하고, 특히 감정 역시 성장 및 개혁의 도구가 된다고 믿었던 나에겐 구 분리가 정말 쉽지 않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드디어 나에게도 이런 타이밍이 왔고, 앞으로는 감정을 다듬고, 건설적인 방법을 찾아내리라 다짐해 본다. F1의 노익장 헤이즈가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대하여는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을지언정 여유와 유머로 넘기듯, 나도 조금은 성숙한 모양새의 태도를 갖춰보리라 다짐해 본다.
이번 사건은 처음으로 회사에서 울어버린 내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제 이 것을 닫고 극복해 낼 것이라 믿어보며 다음 단계를 향해 가려는 내 모습을 응원해 본다.
미성숙한 내가 부끄러웠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내가 다음을 향해 나아가려는 모습이 좋았던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