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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게 되는 미학

버티는 시간을 조금 편안하게 해 줄 삶의 태도

by Grace Hanne Lee

영원한 것은 없다. 불평거리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입맛에 맞지 않는 시스템은 세월이 지나면서 개발되고 발전되기 마련이고, 무능해 보이던 상사도 어느 순간에는 또 쓸모를 다하는 결과를 내긴 한다. 얌체 같던 동료는 꽤나 난처한 상황에 이르러 내 보기에도 안쓰럽고 동정 어린 마음쓰임이 생기게도 되고, 하늘이 내린 천사 같던 절친한 사이도 어느 순간 어쩜 사람의 탈을 쓴 동물이었느냐며 마음이 갈리게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이고 찾아온다 이 낯선 변화는. 너무 크게 흔들릴 필요가 없다. 동요될수록 부끄러워지는 시절이 왔다. 많은 현자들이나 guru들이 겸손을 잠잠히 외치고 권하는 이유가 이것일 테다. 전도서의 외침이 그러하듯. 현실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나이를 향하는 수도자의 자세. 젊은 날 동안엔 이 초연함이 곧 삶에 대한 부질없고 허무한 태도로 전이될까 두려웠다. 열을 내며 아등바등하는 마음이야 말로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열정이며, 삶의 다이내믹이며, 동력이 되어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쯤 오니 산만한 관심과 흩어지는 열은 결국 동력이 되기보단 멈춤이 되고, 삶과 미래에 대한 탐구와 탐험이 되기보단 정체된 헤맴이 되어버린다. 그 시간마저도 값지게 여겨 주는 것이 청춘이란 특수한 시절이었을 뿐. 그 시기를 앓고 나면 앞으로 향하고 진짜 삶의 ‘열정’을 보일 때가 온다. 그때는 늦여름이 지나고 가을바람 선선히 찾아오듯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AI를 기반으로 발전하는 이 시대는 이전과는 다른 속도로 변하며 그 반향 역시 크다. SNS 세태를 비방하며, 너무 많은 정보의 공유로 불필요한 삶의 공유와 그로 인해 누적된 피로도를 비판하며 기성세대들의 만류가 있었으나 시대는 이 꼴로 형국을 이루었고, 스스로 생을 끊는 사람들이 늘어났을 정도로 그 폐단 역시 심각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새로운 경제가 생겨났고(국내 인플루언서 시장 규모는 약 5,907억 원, 2024년 기준, 국세청), 자기 계발이라던가 건강한 삶 등의 긍정적인 변화들도 일어났다. 이 새로운 연결은 새로운 가능성을 일으켰고, 생의 새로운 기회를 주기도 했다. 이 양면적인 '발전'은 인류의 사고의 틀 안에 동(動) 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들어낸 artificial 지능이라지만 결국 신의 섭리 하에 있다. AI가 위협할 인간의 존재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대두되면서도 여전히 초월적인 존재, 전능자, 신을 떠올리지 못하는 인생들이 신기할 정도이다. 그 섭리를 일개 인간이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신의 양상이 있다. 신은 그것을 끊임없이 드러내길 원한다. 그리고 그 질서가 있는 세계로의 초대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다. 그 섭리 중 하나는 모든 인류를 향한 보편적인 사랑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6)


더운 날 후에 추운 날 온다는 것을 머리로 안다 해도 막상 그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 오면 낯선 느낌이다. 아 왔구나. 그러나 여러 전인격적인 모습으로 왔구나 느낀다. 미리 그 변화를 준비하고 바라던 생은 변화를 유연하게 맞이할 수 있지만, 준비되지 못한 몸은 재채기로 시작하여 한 차례의 감기를 앓게 된다. 그러나 앓는 것 따위는 의미조차 없다는 듯 생은 가을에 접어든다. 생은 생대로 흐른다. 잔인해 보이고 정 없어 보이는 듯 하지만, 생은 생의 역할을 다 한다. 전능자의 계획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감기란 오히려 축복이다. 한 차례 앓고 나는 감기는 몸에 면역을 키운다. 미리 키워두었으면 좋았겠지만 여름의 생이 바빴을 수도, 그저 게을렀을 수도, 혹은 정말 여름을 살아냈다는 것 만으로 응원받을만한 상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가올 완숙의 겨울을 나기 위해 갖춰야 할 기본 면역이 있다. 감기는 그런 날을 위한 신의 도움일 수도 있다. 이는 꽤 보편적인 전능자의 사랑이라 여름 내 게으르게 지내던 무능한 사람도, 자비 없던 이도, 악한 이도 한 차례 치르게 된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그 신의 섭리를 다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의 보편성이다)


그래서 더욱 지금 내가 느끼는 불평과 불만에 미련 둘 필요 없다. 나를 괴롭게 하던 일들이 나의 감기일 수 있기에. 혹은 나를 괴롭히던 이들 역시 그 감기를 앓고 나서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기에. 조금 더 차분히 바라볼 수 있다. 이 상황을 통해 내가 배워야 할 life lesson은 무엇이려나. 하는 자세로 생을 마주한다면 조금은 안정적인 흐름을 갖출 수 있다. 나의 안정적인 생의 리듬은 후에 다가올 추수의 계절 가을을 좀 더 뾰족하고 좀 더 편안하게 시작할 수 있게 돕는다. 물론 부끄러운 흑역사 예방에도 단연 최고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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