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습니다
6월 마지막 날, 잘 다니던 회사를 정리했다. 5월에 큰 프로젝트를 연달아 해치우면서 업무 피로도가 쌓이고 있긴 했지만 이 업을 하면서 생기는 불가피한 스트레스였기에 '퇴사'를 결정할 만큼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사를 '잘' 다니고 있어서 그만두게 되었다. 작은 회사였지만 성장하는 회사였고, 주도적으로 일하는 기회가 주어져 참 많이 배웠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합이 좋아서 신이 났다. 하지만 익숙해졌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그래서 결정을 내렸다. 잠시 일시정지를 해야겠다고.
첫 번째 회사는 진저리가 나서 그만두었던 터라 속세를 떠나고자 제주도에서 몇 달의 갭이어를 보냈는데, 참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내가 부스러기처럼 소진되었다기보단 더 큰 그릇이 되고 싶었던 시기였는지 예정된 여행이 취소되어도 아쉽지 않았고 오히려 '비우기'보단 '채우고' 싶었다.
그리고 일을 그만두면 당분간 일 생각은 나지도 않겠다 예상했건만, 진행 중이던 행사는 잘 마무리되고 있는지 궁금했고 올라오는 후기를 살펴봤다. 후배들이 미안해하며 카톡으로 질문을 하면 마침 심심했다며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을 해주곤 했다. 몇 달 동안은 일을 안 하고 있다는 것도 자주 잊곤 했다. 다른 브랜드 팝업에 놀러 가면서 '여기는 이렇게 하는구나. 우리도 이렇게 하면 좋았겠다. 이 제작물은 어디서 맞춘거지? ... 아 맞다, 나 그만뒀지'
감사하게도 가장 오래 담당했던 브랜드에서 행사 초대를 해주셔서 다녀오기도 했는데, 담당자가 아닌 손님으로 가보고 크게 깨달았다. 손님으로 와도 재미있고 좋지만 담당자로서 이 공간을 꾸미고 누군가를 초대했을 때 내가 더 재밌었구나.
그때가 더 '나'다웠구나 - 내가 정말 이 일을 사랑했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통장의 잔고는 현실적으로 나를 흔들(?)기도 하지만, 내 결정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루빨리 새로운 회사를 찾아야겠단 마음도 생각보다 들지 않는다. 앞으로도 나아갈 길이 멀기에 - 열심히 공들여 쌓은 커리어라는 탑을 한 발짝 뒤에서 잘 쌓고 있는지, 기울어지진 않았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분명 필요했다. 회사에서는 월별, 주간 리뷰를 그렇게 챙겨서 하는데 3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랑했던 이 일도 마음속에서 충분히 리뷰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야 다음 새로운 환경에서 조금은 더 성숙한 에너지를 발휘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애정 하는 후배가 생각보다 빠른 이직을 시도하지 않은 나에게 '불안하진 않으세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불안하진 않았다.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더 잘할 자신이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고 그렇게 쌓은 커리어가 자랑스럽다. 앞으로 나아갈 시간의 발판을 만들어준 그 시절의 내가 너무 고맙다. 그래서 이 회사에서 일한 것을 작게 표현하는 곳이라면 선택하지 않고 싶을 정도.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일지도 모르겠지만, 언제 마무리가 될지 모르는 두 번째 갭이어의 시간에는 실무와 떨어져 감을 잃는 건 아닐지, 뒤처지는 건 아닐지 불안해하기보다는 회사를 다니면 경험하지 못할 경험과, 여유, 인사이트를 충분히 얻어서 다시 멋지게 사랑하면서 일할 수 있도록 충분히 충전할 예정이다. (개인적인 삶도 잘 챙기고!)
나의 용기있는 20대 마지막 일탈이 참 자랑스럽다.
20대에는 열정을 불태우는 시간을 보냈다면,
30대에는 조금 덜어낼 줄 알는 유연함과 조금은 멀리 볼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더욱 좋고.
당분간 저는 긴축정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