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신작이 나왔다고 해서 큰 기대감을 품고 읽어봤다.
그의 소설 모두를 읽어보고 좋아한 건 아니지만 하루키만의 섬세한 묘사와 1Q84의 독특한 세계관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직업으로의 소설가>를 읽고 그의 소설보다는 소설가로서의 그의 자세를 좋아한다.
이번 소설집의 단편 하나하나는 특정한 기억과 발상을 기반으로 쓰여졌다. 구성과 배경이 탄탄한 정물화라기보다는 빠르게 어떠한 기억과 발상을 기반으로 쓰인 크로키같이 느껴진다고 할까.
<일인칭 단수>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하루키라는 이름을 떼고 그냥 소설집이라고 했을 때, 다른 소설들과 동일한 매대에 두고 쭈욱 나열했을 때 이 소설을 집어 들 것 같지 않다. 오히려 하루키라는 이름이 기대감을 크게 부풀린 것 같다.
가장 개인적인, 가장 보편적인 기억과 기록의 주인공
'나'라는 소우주를 탐색하는 여덟 갈래의 이야기
단편들은 주인공이 자신의 기억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기억은 과거의 어떤 사람과 스쳤던 장면이
기도 하고, 비틀즈와 클래식, 야구와 같은 장르에 대한 감상이기도 하다. 초반에 수록된 <돌베개>, <크림>은 만족스러웠지만 뒤에 이어지는 단편들에서 화자의 모습엔 하루키가 투영되어 나타나고 소설보다는 에세이로 느껴졌다.
문학은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그걸 독자가 자신만의 세계에서 소화하고 음미하는 게 맛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단편들은 직설적으로 느껴졌다.
여성을 묘사할 때 '아름답다/못생겼다'라는 판단 하에 그 사람의 디테일을 묘사하는 접근도 안타깝다. 사랑에 대해 육체적 관계를 뗄 순 없겠지만 구태여 항상 결합해 사랑의 건조한 관점에 대해 보여주는 것도 아쉽다.
특정한 감상이나 여운을 불러일으키는 난해함은 좋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딱히 여운을 느끼지 못했다. 소설을 읽고 감상을 느낄 컨디션이 아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몇몇 단편집들에는 하루키만의 섬세한 묘사가 담겨있는 문장들이 좋았다.
뒤에 남는 것은 사소한 기억뿐이다. 아니, 기억조차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
그래도 만약 행운이 따라준다면 말이지만, 때로는 약간의 말이 우리 곁에 남는다. 그것들은 밤이 이슥할 때 언덕 위로 올라가서, 몸에 꼭 들어맞게 판 작은 구덩이에 숨어들어, 기척을 죽이고, 세차게 휘몰아치는 시간의 바람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동이 트고 거센 바람이 잦아들면, 살아남은 말들은 땅 위로 남몰래 얼굴을 내민다. 그들은 대개 목소리가 작고 낯을 가리며, 다의적인 표현 수단밖에 갖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그들은 증인석에 설 준비가 되어있다. 정직하고 공정한 증인으로서.
- <일인칭 단수> 중 돌베개
중심이 여럿(혹은 무수히) 있는 원이, 어떻게 하나의 원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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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인지 대충 알겠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더 깊이 생각하다 보면 다시 알 수 없어졌다. 그러기를 되풀이한다. 아마 그것은 구체적인 도형으로서의 원이 아니라, 사람의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원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를테면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무언가에 깊은 연민을 느끼거나, 이 세상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거나, 신앙(혹은 신앙 비슷한 것)을 발견하거나 할 때,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게 그 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게 아닐까
- <일인칭 단수> 중 크림
연말에 따뜻한 이불 속에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이 책은 아니었다 ㅠㅠ
<달러구트의 꿈 백화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처럼 연말에 읽기 좋은 소설엔 무엇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