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 사진, 글쓰기
여행을 다녀오면 할 말이 많아진다. 가슴속에 가득한 여행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싶다. 얼마나 길을 헤맸는지, 처음 먹어본 낯선 음식은 어땠는지, 대가 없이 도와준 현지인에 대해서, 내가 감탄한 멋진 풍경에 대해서 하고픈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수다!
여자 둘이서 두 시간 동안 통화를 한 뒤 전화를 끊으며 하는 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자!”
이 상황에서 남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여자라면 공감 백배다. 여자들의 평균수명이 남자들보다 긴 이유가 수다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수다는 평소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 스트레스는 내보내고 행복감은 더해주는 수다의 순기능을 적극 지지한다. 그리고 수다가 여자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르시는 말씀! 아는 사람은 이미 안다, 남자들 수다도 여자들 못지않음을. 남자끼리 모여서 수다를 떨면 접시만 깨지는 게 아니라 지붕까지 들썩거린다.
지난 여행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한 번 더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여행 이야기를 하다가는 오해를 사기 쉽다. 여행에 관심 없거나 여행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자랑하는 모양새로 비칠 수도 있다. 편견 없이 여행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 역시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하는 게 맘이 편하다. 그래서 여행 이야기는 통하는 사람끼리 하는 게 좋다. 주변에 그런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행운아에 속한다. 중년 나이에 편하게 여행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흔하지는 않으니까.
만약 그런 친구가 없다면 누구와 여행수다를 나눌까? 그럴 때 부담 없는 친구 1순위는 여행 동호회 사람들이다. 공통된 관심사로 모였기에 여행에 대한 어떤 이야기라도 마음 놓고 주고받을 수 있다. 아들과 세계여행을 가기 전 ‘세계일주 스터디클럽’이라는 모임에 가입을 했다. 세계일주에 대해 공부하고 경험을 나누는 곳이다. 사실 정보를 얻는 것보다도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 자체가 좋았다. 베테랑 여행자건 초보 여행자건, 나이와 성별에도 관계없이 친구가 되는 점도 맘에 들었다. 지금도 가끔 번개에 참석하고 궁금한 것들이 생기면 물어보기도 한다. 주제별로 수많은 여행 동호회가 있으므로 자신에게 잘 맞는 곳을 찾아보기 바란다.
나는 장기여행을 떠나기 전에 먼저 다녀온 여행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동호회를 통해 알던 분을 만나기도 하고, 전혀 안면이 없던 분을 만난 적도 있다. 보통 그 여행자의 블로그에 글을 남겨 부탁을 드리면 대부분 기꺼이 응해 주었다. 2011년 아프리카와 2016년 유럽을 가기 전에도 이런 식으로 선배 여행자를 만났다. 책이나 온라인으로 얻는 정보보다 실제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특히 아프리카처럼 여행 난도가 높은 지역을 갈 때는 이런 만남이 더욱 용기를 내게 해주었다.
2016년부터 여행 강좌를 열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제는 체계적이고 공식적으로 여행수다를 나누고 있다.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선배 여행자의 도움이 절실하다. 먼저 경험해본 사람이 차근차근 안내해 준다면 한결 발걸음이 가볍지 않겠는가. 마흔 살 왕초보 여행자로 시작해 이제 쉰 하나, 적어도 나 같은 중년의 초보 여행자들을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해보니 여행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저 약간의 용기와 약간의 방법이 필요할 뿐.
지난 여행을 추억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사진이다. 이 날 내가 뭘 했더라, 기억이 가물거려도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영화 보듯 기억이 되살아난다. 여행을 추억하는 시간은 식사 끝에 기다리는 디저트처럼 달콤하다. 나중에 보는 여행 사진은 마치 행복 보정 필터를 끼운 듯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여행이란 이렇게 추억하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완성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더욱 사진 찍기에 매달리는지 모르겠다.
사진을 찍는 건 참 쉬워 보인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는 건 꽤 번거로운 작업이다. 양껏 찍은 사진은 많은데 정리하기가 귀찮아 내버려 두기 일쑤다. 예전 필름 카메라 시절에는 꼭 인화를 해야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차곡차곡 사진들을 정리해 앨범을 만들었다. 지금도 생각이 날 때면 옛날 종이 앨범들을 꺼내 보곤 한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컴퓨터나 휴대폰 화면으로만 사진을 본다. 그것도 잠깐이지, 사실 컴퓨터에 들어 있는 오래된 사진 파일들을 자주 들춰보게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미라 씨는 여행을 다녀오면 바로 사진들을 골라 포토북을 주문한다. 역시 사진은 손에 잡히는 앨범 형태가 보기 편하다는 지론이다. 자리는 차지하겠지만 기기 없이 언제라도 꺼내 볼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산다.
여행에서 사진이 중요하다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사진에 집착한 나머지 오직 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어딜 가면 카메라부터 들이댄다. 무조건 사진부터 찍어야 한다는 강박이 느껴진다. 아니 사진 먼저 찍는 게 문제는 아니다. 사진을 찍은 후에라도 찬찬히 둘러보고 충분히 느끼고 체험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다행이다. 그보다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여행의 장면들을 저장하는 것에만 열중한다. 그게 끝나면 할 일은 다 마쳤다는 듯 얼른 자리를 뜬다.
우리는 여행을 와서도 왜 이리 여유가 없는 걸까. 해치워야 하는 숙제처럼 빨리 사진 찍고 빨리 이동하고, 여행지에서의 하루는 바쁘기만 하다. 사진 찍기가 여행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고 여행 자체를 즐겨 보는 건 어떨까? 적어도 여행 중 몇 시간이라도 말이다.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그리 못할 일도 아니었다.
체코 여행 중 나는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나 역시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는 여행자였다. 독일 드레스덴에서 머물다가 체코에 며칠 다녀오기로 했을 때, 문득 사진을 찍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개월의 짧지 않은 여행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진 찍기가 의무처럼 느껴졌다. 사진을 찍지 않는 여행이라, 사진으로부터 해방된 여행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체코에서의 3일 동안 나는 카메라를 숙소에 빼놓고 다녔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프라하 구시가지와 동화마을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사진을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결정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전과는 전혀 색다르고 멋진 경험이었다.
프라하의 바실리카 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하나하나 문양과 색깔이 달랐고 특이하게 꽃무늬가 많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것들을 감상했다. 평소 나는 유적지나 건축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연과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갔다. 신기하게도 카메라를 내려놓자 스테인드글라스가 그렇게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느낌과 생각이 떠올랐고 그것들을 천천히 수첩에 적어 내려갔다. 저 스테인드글라스 문양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싶었다. 굉장히 독특하고 우아하면서도 화려할 것 같았다. 모두들 한번 휘 둘러보고 나가는 그곳에서 나는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즐겼다.
성당에서뿐만 아니라 체코 여행 내내 나는 더 천천히 더 깊게 순간순간을 느꼈다. 물론 단 한 장의 사진도 찍지 않은 건 아니었다. 휴대폰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연하게 생각하던 사진 찍기를 내려놓으니 훨씬 여유로웠다. 보다 순수하게 여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후 나에겐 새로운 여행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겼다. 바로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는 여행이다. 아예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는 여행. 여행에서 완전히 사진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언젠가 꼭 한번 해보고 싶다. 모든 여행자에게 나와 같은 실험을 권하는 건 아니다. 여행에서 사진은 중요한 요소지만 너무 사진에만 목매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을 찍더라도 충분히 여행 자체에 빠져보는 경험을 해보시길.
여행은 물건이 아닌 경험에 투자하는 일이다. 경험은 오래도록 기억되고 추억된다. 그러나 기억도 온전히 믿을 수는 없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주일만 지나도 가물거리는 것이 우리의 기억 아니던가. 기억이란 의외로 쉽게 휘발된다. 심지어 실제와는 다르게 재편집되기도 한다. 같은 경험을 한 두 사람의 기억이 서로 다른 경우를 흔히 만난다. 이렇게 달라지거나 사라지는 기억을 최대한 붙드는 방법은 기록이다. 결국 기록한 만큼만 기억으로 남는다.
기록을 위한 가장 익숙한 방법이 앞에서 이야기한 사진이다. 그런데 사진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억을 간직하는 비법이 있다. 바로 글을 쓰는 것. 글로 기록을 해놓는 것이 더 생생하게 여행을 기억하게 해준다. 낯선 도시에서 느꼈던 설렘과 막막함도, 기대하지 않았던 친절에 마음 따뜻해지던 순간도, 멋모르고 당한 바가지에 속상하던 시간도 다시 떠오른다. 여행 강좌를 들었던 숙희 씨는 그동안 많은 여행을 했지만 그걸 하나도 글로 남겨 놓지 않은 게 가장 아쉽다고 한다.
자신만을 위해서라도, 글로 기록을 남기는 일은 의미가 있다. 글쓰기는 단지 펜과 종이만 있으면 될 뿐, 카메라 같은 비싼 도구가 필요치 않다. 알고 보면 글쓰기가 사진 찍기보다 쉽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글쓰기를 훨씬 어려워한다. 아무래도 글쓰기 자체에 대한 부담감이 큰 탓이다. 어릴 때부터 억지로 써서 검사 맡는 일기와 공개하여 평가받는 글쓰기에 시달려 왔으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목적이 아니라면 부담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글쓰기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가계부를 쓰는 것이다. 가계부 정도라면 누구라도 만만하게 시도해 볼 만하다. 날짜별로 지출이 기록된 경로만 보아도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여행 경비를 어디에 얼마나 썼는지 확인하는 일은 자신의 여행 스타일을 파악하고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영수증을 잘 정리해 놓으면 가계부를 쉽게 쓸 수 있다.
그다음으로는 메모를 하는 것이다. 이때 메모는 아주 간단하게 단어 몇 개를 적는 정도를 말한다. 맥락이 없어도 상관없다. 자신만 알아보면 되니까. 목적지나 이동 시간, 먹었던 음식, 순간적인 느낌이나 생각, 만난 사람의 이름 등을 까먹기 전에 적어 놓는다. 주로 나는 여행 중간에 잠시 쉴 때나 버스나 전철에 앉아 있을 때 얼른 메모를 한다. “포터리 뮤지엄, 졸리다, 5시 40분, 일본말 같다, 돼지마늘감자” 2016년 4월 21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적어 놓은 메모 내용이다. 남들이 보면 암호 같겠지만 나는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이해한다.
마지막으로 일기를 쓰는 것이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을 때가 가장 일기 쓰기에 알맞은 시간이다. 그 외에도 시간이 여유로우면 자리 잡고 앉아서 글을 쓴다.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릴 때(우리나라와 달리 꽤 오래 걸린다)나 카페에서 느긋하게 쉴 때도 괜찮고, 공항에서 환승을 기다릴 때도 긴 글을 쓸 여유가 있다. 아니면 여행을 마치고 집에서 차분히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행 중 단어 몇 개, 문장 몇 줄이라도 메모해 놓으면 돌아와서 글을 쓸 때 상당히 도움이 된다.
여행 당시에 기록을 할 때는 작은 수첩이나 노트를 이용한다. 특히 크로스백에 쏙 들어가는 가볍고 작은 크기가 좋다. 유럽여행 3개월 동안 나는 손바닥보다 작은 수첩에 가계부를 적고 메모를 하면서 다녔다. 수첩에 볼펜이 달려 있어 여행용으로는 그만이었다. 이제까지 사용해본 수첩 중 최고로 유용해서 강의를 듣는 수강생들에게 선물로 드리고 있다.
여행지에서 일기나 글을 쓸 때는 그날 있었던 일뿐만 아니라 무엇을 써도 상관없다. 스쳐 지나가는 두서없는 생각들, 이유 없는 감정들, 갑자기 떠오른 오래된 기억, 무엇이든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 그러면서 남은 여행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을 정리한다.
여행 중 글을 쓰는 일은 내가 겪는 경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경험이 그저 나를 지나쳐 가지 않게 만드는 것, 내가 겪은 일을 돌아보고 글을 쓰는 과정은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를 준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무엇인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만든다. 내 마음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글쓰기는 여행을 하면서 자신에게 스스로가 가장 좋은 친구가 되게 하는 방법이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행복의 기원', 서은국 저)
모든 쾌락은 곧 사라지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앞서 여행은 모두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준비과정이 1단계, 실제 여행이 2단계, 여행을 추억하는 것이 3단계. 3단계로 이루어지는 여행을 충분히 누린다면 여행자는 한 번의 여행으로 모두 세 번의 여행을 경험하는 셈이다. 즉 행복의 빈도가 늘어난다.
여행을 추억하는 3단계 중 가장 강력한 도구는 글쓰기다. 여행에서 돌아와 내가 쓴 글들을 읽어 보면 다시 한번 여행을 체험하는 느낌이 든다. 글로 남긴 여행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글쓰기는 행복의 빈도와 더불어 행복의 유효기간까지 늘려 준다. 그것은 여행이 여행으로 끝나지 않고 일상이 더 행복해지도록 도와준다. 다음에는 당신의 여행을 알토란처럼 꽉꽉 채워줄 글쓰기를 한 번 시도해 보시길. 모든 시도에는 배움이 남을 뿐 실패는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