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과일 2탄 나갑니다! 열대과일은 아니지만 제주에서 자주 먹었던 과일이 또 있다. 진작에 쓰지 못하고 지난봄의 추억을 이제야 소환한다. 우선 딸기. 나어릴 적엔 4월, 5월에 딸기를 먹었다. 리얼 밭 딸기였다. 그러나 현재 딸기는 명실공히 겨울 과일.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겨울딸기 시절은 오래되었다. 2월이면 끝물이니 원.
딸기 철엔 카페에서 딸기 타르트, 딸기 크루아상 같은 디저트를 팔았다. 나는 상큼 달콤한 맛에 혹해서 보일 때마다 사 먹었다. 두툼해진 허리춤의 팔 할은 녀석들 때문인 듯. 알다시피 올해는 워낙 금 딸기였다. 나는 2월쯤 가격이 떨어질 때를 기다렸다가 하나로마트에서 500g짜리를 하나씩 사 오곤 했다. 당시에 삶은 채소를 위주로 한 아침밥을 즐겨 먹었다. 금 딸기를 몇 개 잘라 채소와 같이 먹으면 안구도 위장도 만족.
이사하고 겨우 집안 살림 장만을 마친 2월. 동네 뒷길을 걷다가 커다란 딸기 모형을 발견했다. 길가에 우뚝 서있는 게 뜬금없었다. 촌스럽기도 했고. 나무 울타리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초록색 천막을 덮은 비닐하우스.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았다. 간판도 없었다. 딸기 농장인가? 분위기가 매우 썰렁했다. 선뜻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번을 지나치던 중, 오늘은 반드시 저 안을 들어가 보리라, 결심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울타리 안에 차가 몇 대 주차되어 있었다.
"계세요? 여기 딸기 파시나요?"
비닐하우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내부는 보기보다 널찍했다. 앞쪽에 난로가 있고 뒤로 딸기밭이 펼쳐졌다. 사장님인 듯한 남자분이 걸어왔다. 밭 사진을 좀 찍어둘걸. 사진이 없어 아쉽다.
"딸기 사시게요?"
"네, 조금만 살 수 있을까요? 1kg 정도요."
"그럼요, 잠깐 기다리세요."
사장님은 내 말을 듣곤 밭 사이로 쓱 걸어갔다. 난로 앞 테이블에 한 여자분이 앉아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손님인 줄 알았던 그녀는 나처럼 제주살이를 하는 이주자였다. 경력 2년 째인 선배님이시다. 여기서 알바를 한단다.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들 답지 않게 제주의 매서운 겨울에 대해, 예상치 못했던 일상의 자잘한 어려움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여자들끼리야 수다 타임 한 번이면 금방 친해지는 법.
그동안 사장님은 투명 팩에 딸기를 잔뜩 담아 오셨다. 큰 것만 골라 오셨다고. 말씀대로 정말 컸다. 싱싱한 딸기! 막 따온 딸기! 알고 보니 이곳은 딸기 체험 농장 '딸기나무'였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딸기 따기 체험을 하는 곳. 우리 집과 같은 덕행로였다.
"차 가지고 오셨어요?"
"아뇨, 산책하다가 들른 거라서요."
"들고 가시려면 무거울 텐데. 차를 가지고 오시지."
에이, 무거워봐야 얼마나 무겁겠어. 집에서 가깝던데. 나중에 찾아보니까 1km 떨어져 있다. 그런데 무겁더라고요. 겨울바람은 쌩쌩 몰아치지, 의외로 1kg은 묵직했다. 네 저는 (팔 힘이) 약한 여자입니다. 역시 현지인 말씀은 진리. 무조건 따르는 게 이득. 힘든 만큼 딸기는 꿀맛이었다. 당도보다 반한 건 '신선도'였다. 딸기가 막 살아있는 것 같아! 탱글탱글해 아주!
3개월이 흘러 봄이 무르익은 5월의 어느 날. 운전하던 중 블루베리 농장이 눈에 띄었다. 나는 무작정 쳐들어갔다. 딸기 농장의 경험이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아직 팔 만큼 익지 않았다고 해서 구경만 하고 나왔네. 비닐하우스 안에서 블루베리들이 송알송알 익고 있었다. 귀여운 것들! 육지에선 생 블루베리가 꽤 비싸서 사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들 수입산 냉동 블루베리를 많이 먹지 않나?
블루베리에 대해서도 잊지 못할 추억이 한 자락 있다. 2018년 8월. 아들이 4년간 공부했던 알래스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알래스카 대학도 구경하고 겸사겸사 여행도 하고. 아들은 우리를 툰드라 지역에 데려갔다. 고리적 교과서에서 언급했던 그 '툰드라' 말이다. 여름의 툰드라는 낮은 덤불과 풀로 덮인 습지였다. 가운데 자리한 호수 쪽으로 갈수록 땅은 질퍽하고 꿀렁거렸다. 겨울엔 아마 완전히 얼어붙겠지.
우리는 가장자리 마른 지역에서 야생 블루베리를 따먹었다. 땅바닥에 깔린 블루베리 덤불을 헤쳐야 잘 익은 베리를 딸 수 있었다. 그건 엎드려야 가능했다. 세 식구는 매의 눈으로 엉금엉금 블루베리를 찾았다. 근데 이게 도무지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만 딸까 싶으면 저기 보이고, 저것만 따먹자 하고 돌아서면 또 보이고. 먼저 따는 사람이 임자! 무주공산에 널린 보물찾기 같았다. 아직도 사피엔스에게는 채집 본능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유전자의 힘이여.
우리는 '이제 진짜 그만!'을 외치고 벌러덩 누웠다. 땅은 푹신푹신했고 햇빛은 따사로웠다. 싸온 샌드위치 도시락을 까먹을 시간. 툰드라에서 퍼질러 앉아 점심을 먹을 줄이야. 세상 다시없는 꿀맛이었다. 애피타이저와 디저트는 동일 품목인 야생 블루베리! 나는 알래스카 여행 중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 돌아갈 때도 우린 작은 물병에 한가득 블루베리를 담았다. 저녁에 숙소에서 또 블루베리 파티를!
아들 말로는 여름에 블루베리를 따먹다가 곰과 마주치는 일이 흔하단다. 혼자서 정신없이 덤불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데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무언가가 있다면 곰일 확률이 높다고. 곰 역시 블루베리를 따먹느라 정신 팔고 있다네. 실제로 아들이 불과 몇 미터 옆에서 곰을 발견했다고 한다. 블루베리를 내던지고 엄마야 나 살려라 도망쳤단다. 잘했다 아들아. 암 블루베리보다 목숨이 중요하지.
또 삼천포로 빠졌다. 제주도 농장으로 돌아가세. 나는 농장에서 블루베리를 사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실망하기엔 일렀다. 하나로마트에서 제주산 블루베리를 파니까. 그것도 옆 동네 한동리 산. 이거야말로 찐 로컬푸드 아닌가. 블루베리 500g의 가격이 만 오천 원에서 만 원으로 다시 칠천 원으로 떨어졌다. 그러다 도로 만 원에 정착했다.
나는 만 원일 때 두 팩, 칠천 원일 때 두 팩씩 사 왔다. 냉장실에 넣어두고 아침밥 접시에 한 줌씩 올려 먹었다. 나중에 한 팩을 더 사서 냉동실에 넣었다. 지금도 얼린 블루베리가 조금 남아있다. 아끼는 마음으로 우유에 넣고 갈아먹는다. 칠천 원 라벨이 딱 박히고 알이 가득 찬 박스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매일 세심하게 기록하지 못한 게 몹시 후회스럽다. 바닥에 깔린 한 줌이 소중하고 소중하다.
제주도의 시골에 사는 즐거움이란 농장에서 바로 사 먹는 과일의 맛이 포함된다. 과천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웃 동네를 기웃거리다 과일 농장을 발견한다니. 제주도 하고도 시골에 살기에, 어렵고 힘든 점도 많지만, 깜짝 선물 같은 기쁨이 딸려온다. 소소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이제 9월. 제주살이가 실제로 3개월쯤 남았다. 12월은 짐 정리하고 처분하고 이사를 준비하기만도 바쁠 테니까. 가능한 동쪽 마을 시골살이의 장점을 최대한 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