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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Sep 05. 2022

이번 생에 태풍은 처음이라

태풍 힌남노, 아직 무사합니다

한겨울부터 시작해 제주 날씨의 어려움은 웬만큼 겪었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매서운 겨울바람, 엄청난 습기와 함께한 장마철, 그리고 아침부터 실내 온도 30도가 되어버리는 한여름......


가을이 온다고 좋아라 했더니 아, 태풍이 기다리고 있었구나! 지난주부터 역대급 태풍 남노가 온다고 난리였다. 비가 오기 시작한 건 목요일 밤부터였다. 금요일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토요일 아침 잠시 그쳤다가 한두 번 뿌리곤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일요일에도 잠깐 비가 내렸다가 몇 시간 그쳤다가 또 잠깐 내렸다가를 반복했다. 어젯밤엔 자느라 몰랐지만 밤새 비가 내린 것 같았다. 오늘 월요일은 바람이 더 세어졌다, 초속 10미터 전후. 태풍의 영향치곤 아직 양호한 편이다.



딱 그 시기, 천천히 다가오는 태풍과 함께 베트남 원고 수정 파일이 돌아왔다. 아주 열심히 아니 열두심히쯤 일을 했다. 목요일 아침부터 작업에 매달렸다. 지난번에 수정한 게 워낙 많고 많았다. 디자이너가 불만을 표시할 정도였다. 하긴 거의 끝난 원고라고 생각했을 텐데. 미안해서 커피 쿠폰 하나를 쏘았다. 잘 봐달라는 일종의 뇌물(이라기엔 약소하네).


수정 전 파일과 수정된 파일을 일일이 대조하며 확인했다. 책 전체를 한 바퀴 돌았다, 하루(목요일)가 갔다. 다음날(금요일)도 종일 재차 확인. 두 번에 걸쳐 꼼꼼히 보았다. 이랬으면 그만 작업에 마침표를 찍었어야 했거늘. 미치겠는 건 볼 때마다 자꾸 거슬리는 부분을 발견하는 것이다. 분명 다 고쳤다고 확신했는데 다시 보면 또 고쳐야 해. 아아 신이시여!


지나치게 반복되는 특정 어구와 쉼표, 감탄사를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책은 일단 인쇄가 되면 그 상태로 영원히 남으니까. 토요일엔 녹슨 못처럼 튀어나온 부분들을 죄다 수정했다. 일요일에 다시 그걸 확인하고 또 확인. 드디어 밤에 원고를 편집자에게 보냈다. 그제야 모든 작업이 끝났다.  


일하는 틈틈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태풍이 걱정이었다. 제주도는 동서남북 방향과 해안가냐 중산간이냐에 따라 날씨가 각기 다르다. 비는 한라산과 중산간에 많이 쏟아지고 바람은 해안가가 제일 세다. 우리 집은 해안가와 중산간의 중간에 위치한 단층 빌라. 그나마 안전한 지역이지 않나. 가만히 집에만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하는 희망 사항).


한 번도 부딪쳐보지 않은 태풍이라 감이 잡히질 않았다. 사실 육지에선 아무리 무서운 태풍이 온다 해도 남의 일이었다. 진지하게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중부지방인 과천은 그저 바람이 평소보다 세게 불고 비가 많이 오는 정도였으니까. 여기선 나도 태풍 대비를 해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알음알음 단톡방을 통해 물어보았다.


내가 얻은 정보는 다음과 같다. 바람에 날아갈 만한 물건들을 미리 치워놔라. 현관문과 창문 틈새에 종이박스를 끼워라. 외출이 불가하니 먹을 것과 식수를 장만해 놓으라. 단수가 될 수 있으므로 화장실에 (특히 변기용) 물을 받아놓아라. 단전의 가능성을 생각해 양초를 준비해라.


일단 금요일에 집안에 쌓인 쓰레기를 모두 치웠다. 음식물 쓰레기, 일반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를 차에 싣고 약 5분 떨어진 클린하우스에 갖다 버렸다. 잠깐 사이에 바지와 샌들이 흠뻑 젖었다. 또 뭘 해야 하지? 바깥의 물건들을 치우라고 했지? 나는 테라스에 놓아두었던 작은 의자와 슬리퍼, 세탁세제를 집안으로 들였다. 이제 날아갈 물건은 하나도 없다.


토요일 아침 8시, 비가 그친 상태였다. 장본 지 1주일밖에 안 됐는데 냉장고에 든 게 별로 없었다. 먹을 물만 충분하다. 혹시 모를 양식을 채워놔야겠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8시~9시엔 비가 안 온단다. 잠시 마른하늘일 때 장을 봐야지. 입은 옷 그대로 장바구니와 차 키만 챙겼다. 세화 하나로마트는 8시부터 문을 연다.


8시 20분. 아직 매대에 오늘 차 고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달걀, 감자, 두부, 돼지고기, 오뚜기 3분 요리, 청경채를 담았다. 간편 죽과 당근이 할인 중이네. 얼마 전에 죽을 먹어보니 속이 편하고 괜찮았다. 종류별로 죽 3개, 당근. 닭 가슴살 한 팩도 추가. 예상보다 많이 샀다. 그래도 35,000원. 총액은 저렴했다.


2시쯤 김녕 킹마트에 또 다녀왔다. 단전에 대비해 양초가 필요했다. 아침에 하나로마트에서 같이 샀으면 좋았을 것을. 꼭 두 번씩 일을 한다. 김녕은 비가 오는데 우리 동네 행원리는 안 왔다. 10여 분 거리일 뿐인데 날씨가 달랐다.


단톡방에서 들은 조언 중 문에 종이 박스 끼우는 것과 화장실 물을 받아놓으라는 것만 빼고 모두 준비했다. 박스는 구할 데가 없다. 해안가는 아니니까 괜찮... 겠지? 물을 받아놓을 도구도 없다. 양동이나 큰 대야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어디 가서 구하나. 구한다 쳐도 한 번 쓰곤 결국 버릴 짐이 될 것을. 내 집이 아닌 한시적인 연세 집에서 모든 물품을 구비해 놓기란 불가능하다.   




월요일 아침 현재. 비는 내렸다 멈췄다를 반복하고 있다. 11시경까지만 해도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12시에 가까운 지금, 비와 함께 바람이 점점 거세어진다. 이제부터 시작인 건가? 나 떨고 있니? 밤부터 바람이 초속 20미터 전후가 된다고 한다. 오늘 밤이 고비일 듯. 잘 넘겨야 할 텐데.


뉴스에선 지난주 내내 '태풍 남노'에 관해 떠들어댔다. 아이고, 오려면 빨리 오고 지나가던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데. 한시적 제주도민은 불안하기만 하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하다가도 이렇게 또 무서운 자연을 만난다.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이란 역시 약한 존재구나 싶다. 육지에서 도시에서 몰랐던 자연의 힘을 이곳에선 수시로 느끼게 된다.


현재 소율은 제주살이의 단맛과 쓴맛을 골고루 경험하는 중. 가능하면 단맛이 더 좋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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