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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02. 2024
덕분에 즐거운, 베트남 항공
비행기 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17년 전 첫 해외여행을 떠날 때는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는 자체만으로 신이 났다. 이륙하기 전부터 내 마음은 이미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늦바람이 무섭다. 중년에 시작한 여행은 해마다 간을 키웠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거침없이 돌아다녔다.
여행 구력이 쌓일수록 반대로 비행하는 시간은 괴로워졌다. 유럽처럼 10시간 이상의 장거리 비행을 한다면 전날부터 한숨이 나온다. 낮이고 밤이고 비행기 안에서 잠을 못 이루는 체질이다. 책을 읽거나 일기라도 쓸라치면 금세 두통이 몰려온다. 모니터 속 영화나 들여다보는 수밖에. 그러나 영화도 두어 편쯤 보고 나면 질린다. 결국 답답하고 지루한 시간을 버텨야 한다.
대여섯 시간이 걸리는 동남아시아는 그나마 견딜 만하다. 나는 경비를 아끼느라 주로 저가항공을 타고 다녔다. 아시다시피 데려다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번엔 베트남 항공을 선택했다. 저가항공의 가격이 별로 저가답지 않았다는 게 큰 이유. 그럴 바에야 메이저 항공사면서 가성비가 좋은 베트남 항공이 낫다.
저녁 6시 5분 비행기. 일찌감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카운터 앞의 줄이 짧다. 미리 온라인 체크인을 해두었지만 가방을 부쳐야 한다. 나는 오랜만에 반들거리는 종이 비행기표를 받았다. 매끄럽고 빳빳한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본다. 그래 이 맛이지! 타짜가 화투패를 잡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아닐까. 큐알 코드가 찍힌 모바일 항공권이나 마트 영수증처럼 생긴 탑승권은 어쩐지 가짜 같단 말이지. 나만 그런가?
쾌적한 비행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우선 열심히 면세점을 구경(만)한다, 끝에서 끝까지. 명품에 관심이 많냐고? 네버, 1도 없다. 일부러 걸어 다닌다. 늦은 점심을 먹은 데다 곧 꼼짝없이 몇 시간을 앉아있어야 하니까. 나에겐 절호의 운동 시간인 셈이다. 면세점이 많으면 많을수록 걸음수도 늘어나니까 개이득. 하하하. 기내 소화불량을 예방하는 슬기로운 방법이라고나 할까.
그다음 생수 한 병을 사들고 비행기를 탄다. 승무원에게 물을 달라면 줄 것인데 왜 샀냐고? 지난 오키나와 여행 때 비행기 안이 어찌나 건조하던지. 내내 목이 마르고 잔기침이 나왔다. 물을 챙기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기침을 쏟아내는 민폐녀가 될 지경이었으니까. 이번엔 무려 다섯 시간이다. 바쁜 승무원을 자꾸 불러대기도 민망할 터, 내 물은 내가 준비한다.
마지막으로 미리 핸드폰에 드라마 여러 편을 저장한다. 나는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다운로드했다. 베트남 항공은 당연히 영상 서비스가 있다만. 실제론 오래된 영화와 관심 없는 프로그램만 가득했다. 게다가 헤드셋이 시원찮아 말소리가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실은 영화보다 안전 수칙을 알려주는 화면이 인상 깊었다. 예전엔 승무원이 직접 복도 가운데 서서 몸짓을 했지만 요즘은 만들어놓은 영상을 틀어준다. 뻔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 시간, 나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