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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Mar 16. 2024

남의 눈치 따윈 보지 않는다

목욕탕 의자에 내려놓았던 엉덩이를 일으켰다. 드디어 돌아다닐 시간이다. 도로 하나를 건너자 바로 호안끼엠 호수. 흐리고 습하고 바람이 불었다. 걷기에 알맞은 날씨였다. 어젯밤을 교훈 삼아 나는 반팔 티셔츠를 입었다.


하노이의 겨울을 여행하려면 세 계절의 옷이 필요하다. 오늘같이 25도까지 올라가면 여름옷, 비 오고 쌀쌀하면 톡톡한 바람막이, 기온이 떨어져서 10도 대에 이르면 경량 패딩. 어떤 날이 당첨될지 알 수 없다. 고로 무조건 용도별로 준비할 밖에.




하늘은 회색에, 호수는 탁한 녹색을 띠었다. 해가 없어 시원하지만 풍경이 우중충하다. 더위를 질색하는 이 몸에겐 흐린 게 낫다. 물론 사진이 예쁘려면 햇빛이 쨍쨍해야 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인가. 둘 다 얻을 순 없을까(없겠지)?



호수 안쪽의 작은 섬에 응옥썬 사당이 있다. 섬의 모양이 옥으로 만든 산처럼 보인다 하여 응옥썬(옥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입구의 높은 기둥 사이를 지나 입장권을 샀다. 이어 작은 문을 통과하니 빨간 나무다리가 나왔다. 붉은 난간에 기대어 갖가지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이 자꾸 나타났다. 싱글벙글 웃으며 사진을 찍는 베트남 관광객들. 나까지 덩달아 명랑해진다.  



사당 앞에 놓인 거대한 향 단지가 먼저 보였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향을 피우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당 안은 금칠을 해서 번쩍번쩍했다. 관우를 비롯한 세 명의 인물을 모셨다. 안에선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제단 위엔 꽃과 과일뿐 아니라 과자와 음료수를 산처럼 쌓아 놓았다. 근엄한 위인들이 과자 봉지를 북 뜯고 음료수를 캬 들이키는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가 좋아하는 거면 조상님도 좋아할 거란 생각이 재밌다. 아무렇지 않게 유행하는 간식을 바치는 이 나라 사람들이 귀여웠다. 그려, 맛있는 거라면 뭔들.


어떤 남자는 제단에 봉투를 올린 후 무릎을 꿇고 검은색 종을 댕댕 울렸다. 빨간색 단체 티셔츠를 입은 학생들이 사당 안을 돌면서 기도했다. 사람들은 두 손을 모으고 이마 위로 올렸다 내렸다를 세 번 했다. 중국 영화에서 자주 보던 방식이다. 응옥썬 사당이 그저 문화재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존중받는 느낌이었다.  


뒤쪽 유리관 안에 박제된 거북이를 전시했다. 2미터나 된다는데 실제로 호수에서 잡은 거북이라고 한다. 뜬금없이 사당에 거북이를 모신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건국 전설에 거북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호안끼엠'은 환검, 즉 '검을 돌려주다'라는 뜻이다. 베트남이 중국 명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기. 당시 레러이 장군이 호수를 거닐 때 거북이가 나타나 신성한 검을 건네줬다고 한다. 거북이는 중국을 물리치면 반드시 검을 돌려줘야 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10년 후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호수로 돌아오자 거북이가 검을 회수해 갔다고 한다. 레러이 장군은 레 왕조를 창건하여 국왕에 올랐다.


외국인에겐 믿거나 말거나 한 썰이지만 베트남 사람들에겐 중요한 이야기란다. 우리나라의 단군 신화와 비슷하지 않을까?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하늘의 뜻을 이었다고 강조하는 것 말이다. 어느 나라에나 있는 전설 혹은 신화가 되시겠다.    



나는 사당을 나와 호수를 둘러싼 산책로를 걸었다. 열대 나무들의 가지가 물속까지 늘어졌다. 하늘은 조금씩 개어 군데군데 파란색이 나타났다. 멀리서도 나는 외국인과 현지인을 구분할 수 있었다. 반팔을 입었으면 백 퍼센트 외국인이다. 긴 팔에 재킷까지 걸쳤으면 분명히 현지인이다. 작년 12월 오키나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운 나라에 사는 주민들은 약간의 선선함도 춥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오, 시티투어 버스 정류장이 있다. 탈까 말까? 광고가 붙은 입간판을 살펴보았다. 두 종류의 시티투어 버스가 있는데 가격과 노선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하노이를 처음 걷는 날인데 내 멋대로 투어가 낫지. 잠깐 망설이다 버스를 지나쳤다.


나무 그늘 아래서 춤을 추는 여인들을 발견했다. 노란 옷은 선생님, 갈색 옷은 학생. 노랑 님이 시범을 보이면 갈색 님이 따라 했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것 참 좋은 생각인 걸. 춤을 출 만큼 넓은 실내 공간이 흔하진 않을 것이다. 탁 트인 야외가 안성맞춤이지 않은가.


하늘하늘한 아오자이를 차려입고 빨간 꽃가지를 든 아가씨들은 왜 이렇게 많지? 호숫가에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심지어 은색 반사판까지 들고 다녔다. 걸어갈수록 사진 인파와 자주 마주쳤다. 무슨 시즌인가? 그녀들은 민소매나 끈이 달린 얇은 아오자이를 과감하게 소화했다. 멋을 부리려면 이깟 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렸다.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까지 완벽한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우와! 저분들은 개그우먼인가? 똑같은 스타일의 진녹색, 꽃분홍색 아오자이를 각각 입었다. 머리에도 같은 계열의 스카프를 묶었다. 한 사람은 검은 구두, 다른 한 사람은 흰 구두. 역시 동일한 디자인이다. 선글라스와 가방까지 맞추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커플룩일세.


그녀들의 몸짓은 더 기가 막히다. 고개를 돌리고 쭉 내민 엉덩이를 마주하고, 한 손을 허리와 어깨에 걸치고. 포즈에 따른 익살스러운 표정까지. 시나리오라도 짠 듯 호흡이 찰떡이다. 일반인 맞나요? 진짜 개그우먼 아닌가요? 나는 한참을 서서 구경했다. 당연하다는 듯 그들은 누가 쳐다보든 말든 사진 촬영에만 집중했다.


베트남을 처음 여행하던 몇 년 전부터 눈치챘다. 이 나라 사람들은 사진에 진. 심. 이다. 여기서 진심은 굵은 궁서체. 한국 사람들도 사진이라면 빠지지 않는 민족이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차원이 달랐다. 어나더 클래스랄까. 기성복이 아닌 맞춤옷을 빼입고 각종 소품도 완비하고 특히 표정이 넘사벽. 우린 부끄러워서 저렇게 못 하지.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당당함. 오우 반했어!    


호숫가를 한 바퀴 돌아 응옥썬 사당 쪽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하나도 심심하지 않았다. 물론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했을 것이다. 그나마 호수 산책로는 한가한 편이다. 올드 쿼터 안으로 들어가면 진짜 하노이의 중심에 서게 된다.


아까 건너왔던 도로 앞에 섰다.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물결이 달려온다. 당황했냐고? 천만에. 베트남 여행 짬밥이 얼만데. 이깟 길을 건너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연재 브런치북>

화요일: 얼떨결에 시엄마

토요일: 베트남이 춥다니요


<완결 브런치북>

그래서, 베트남

중년에 떠나는 첫 번째 배낭여행

유방암 경험자입니다만

제주살이는 아무나 하나

무작정 제주, 숲길과 오름

딱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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