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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Mar 21. 2024

올드쿼터가 두렵지 않다

'처음 구시가의 비좁은 거리에 들어서면 겁부터 날 것이다.'


론리플래닛(가이드북)의 하노이 부분에 나오는 문장이다. 베트남 여행을 하노이에서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나는 코로나 이전에 베트남에 여러 번 왔었다. 심지어 북에서 남으로 종단을 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달려오는 길을 건너는 일쯤은 익숙하다. 몸에 쌓인 것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남는다더니 사실이었다.  


차량의 흐름에 잠깐 공간이 비면 발을 내민다. 고개를 돌려 운전자와 눈을 마주치며 걷는다. 대부분 보행자 주변에서 속도를 늦춰준다. 혹시 너무 가까이 붙으면 손을 들어 막는 제스처를 보인다. 나도 흐름에 따라 빠르게 또는 천천히 걸음을 조절한다. 자꾸 해보면 실력이 는다. 정 무서우면 현지인이 지나갈 때 일행인 양 따라가시라. 일명 '묻어가기'. 제일 쉬운 방법이다.    


올드쿼터, 즉 하노이 구시가는 36개의 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리 왕조가 조정에서 사용하던 물건을 만들기 위해 전국에서 유명한 장인들을 불러 모으며 형성되었다. 각각의 거리마다 특화된 상품을 판매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거리 이름도 그곳에서 생산되던 물건에서 유래했다. 항 마(종이 거리), 항 꽛(부채 거리), 항 박(은 거리) 같은 식이다. 전통적인 물건 외에도 지금은 의류, 과자, 커피, 말린 과일, 신발, 옷 등 상품이 늘어났고 상점이 더 많아졌다.


길을 건너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나의 최종 목적지는 동쑤언 시장. 구글맵을 보며 길을 찾았다. 길치에게 구글맵은 거의 구원자. 원자 씨는 최단 코스로 나를 시장 앞까지 인도했다.


시장까지 오는 도중 옷가게와 기념품점만 보였다. 항 마(종이 거리)니 항 꽛(부채 거리)이니 항 박(은 거리)이니 하는 곳들은 어디에 있지? 원자 씨는 심하게 효율적이어서 중간의 다른 길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였다.

 

동쑤언 시장


인파와 느리게 다가오는 오토바이 물결, 이미 주차된 오토바이 군단. 삼중의 장관이 나를 압도했다. 잠시 휴식 시간이 필요했다. 점심밥부터 먹자. 코앞의 분리에우(육수에 토마토를 넣은 쌀국수) 식당으로 들어갔다.



쌀국수라면 언제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옆자리엔 원피스를 입은 중년 여인 둘이 앉았다. 그들은 직원에게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함박꽃처럼 잘도 웃는다. 나도 따라 웃었다. 눈이 마주치자 함박꽃이 더 활짝 피었다.


미소가 오가는 순간. 완벽한 타인들끼리 순수한 호의를 나눈다. 그저 눈을 휘고 입가를 끌어올리는 것만으로. 이토록 쉬운 관계라니. 길어야 1초. 세상에서 가장 빨리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닐까.




동쑤언 시장은 다낭의 한 시장과 비슷하게 생겼다. 가운데 계단이 있고 가장자리를 따라 점포들이 둘러싼 모양이다. 각종 식료품과 식자재, 가방과 신발, 옷 등을 파는 매장이 빽빽했다. 도매 시장치곤 가게들이 작았다. 하노이 최대 규모의 재래시장이라기엔 어쩐지 조촐했다.


나중에 쿠킹 클래스의 셰프와 다시 왔을 때 나는 깨달았다. 시장 안보다 시장 밖의 노점 구역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역시 최대 시장의 명성은 살아 있었다. 이때는 대충 훑어보고 금방 실망했다. 여행자의 얄팍한 감상이었다.  



한편 동쑤언 시장은 다른 면에서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바로 화장실! 사용료 오천 동(한국돈으로 250원)을 받고 휴지를 내준다. 사용료야 뭐 받을 수도 있지. 화장실 안에서 나는 경악했다. 내부의 절반은 문이 없이 트인 공간. 그곳엔 변기만 주르륵 놓였다. 중간 시트가 없는 동남아식 변기 말이다.


어어. 저기서 나란히 앉아 용변을 본다고? 설마. 그러나 설마가 항상 사람을 잡는 법. 눈앞에서 누가 불쑥 허연 엉덩이를 깠다. 으악. 나는 맞은편의 문 달린 화장실 칸으로 뛰어 들었다. 이럴 수가. 내 눈을 씻고 싶다. 불시에 엉덩이 공격을 당해버렸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문 틈으로 밖을 살폈다. 그녀는 벌써 나갔나 보다. 아무도 없다. 또 공격을 당하기 전에 얼른 볼 일을 보고 화장실을 나왔다. 나는 픽 웃음이 터졌다. 별 걸 다 보여주시네요. 참.


롱비엔 철교


다시 구글맵을 켰다. 롱비엔 역이 가까웠다. 기차역이 아니라 역 앞의 카페(Serein cafe & lounge)에 갈 작정이다. 카페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롱비엔 철교의 풍경이 그렇게 멋있단다. 마침 차 한 잔 마시며 쉬고 싶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원자 씨가 가리키는 큰길 말고 샛길로 들어섰다. 길치 경력이 오래 쌓이면 가끔 겁을 상실한다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무섭진 않았다. 거리가 낡았을 뿐 전혀 위험하지는 않았다. 비수기 겨울의 하노이에선 안심하고 걸어도 좋다. 담벼락 아래 거대한 오토바이 주차장을 지나 곧 카페를 찾았다.



나는 복숭아티와 쇼콜라를 사들고 4층 옥상으로 올라갔다. 나 혼자였다. 느긋하게 즐겨보자. 그러나 낭만과 현실은 달랐다. 들락날락하는 햇빛이 내리쬐어 몹시 더웠다. 한 입 맛본 티와 쇼콜라는 징그럽게 달았다. 불친절한 직원에 비싸고 맛없는 디저트에 더위까지. 뭔가 속은 기분?


그래, 오직 뷰를 위해 참아 보자! 아래로 홍강을 가로지르는 철교와 푸른 나무들과 집들이 펼쳐졌다. 롱비엔 대교는 에펠 탑을 건설한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했다. 프랑스 식민 지배 기간 동안 프랑스산 자재로 건설되었다. 녹슬고 낡은 철교가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스러운 분위기가 도시와 잘 어울렸다.



저기 도자기로 만든 모자이크 벽화 거리가 보였다. 하노이 건립 천 주년을 맞아 세계 각국 예술가가 함께 만들었다. 롱비엔 다리에서 강둑을 따라 4km에 이른다. 차가 달리는 도로변에 있어 가까이에서 보긴 어렵다. 드라이브하면서 보거나 높은 데서 보거나. 이 카페는 오직 뷰가 열 일 하는 곳이었다.


조금 있다 서양 청년이 들어왔다. 얼굴이 마주치자 그는 싱긋 웃었다. 사진을 열심히 찍더니 갑자기 뒤 계단으로 올라갔다. 어라, 한 층이 더 있었어? 나는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는 또 웃으며 "One more!"를 외쳤다. 나도 따라 올라갔다. 카페는 총 5층이었다. 그러니까 거기가 진짜 루프탑이었다. 다리가 더 잘 보였고 햇살이 더 따가웠다. 등짝이 뜨거워서 오래는 못 있겠다.       


항 마


얼추 인형극을 보러 갈 시간이 다가왔다. 구글 맵은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하지만 가장 재밌는 길을 알려주진 않는다. 나는 겁을 상실한 김에 말 안 듣는 아이가 되기로 했다. 지도가 가리키는 길을 무시하고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모로 가도 서울만 아니 인형극장에만 가면 되니까요.



꽃이 가득한 가게들이 늘어섰다. 자세히 보니까 어떤 건 생화, 어떤 건 조화였다. 어쨌든 예쁘면 된 거다. 건물들이 종이집처럼 다닥다닥 붙었다. 보통 이층이나 삼층인데 작은 테라스엔 화분이 나와 있다. 거리에 서있는 나무는 삼층까지 닿았다. 저 집은 이층 벽에 식민지 시대의 프랑스풍 조각이 아직도 새겨져 있다! 낡고 갈라졌어도 옛 모습이 선연했다. 오 멋스럽다.



빨간 등과 불교 용품들이 가득한 가게들이 나타났다. '항 마'였다. 드디어 옛 거리를 발견했다. 온통 붉은색이 강렬했다. 낡은 건물과 화려한 물건들이 대비되어 분위기가 독특했다. 새로 지어 깔끔하게 페인트칠한 건물과 옛 부조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물, 칠이 벗겨진 건물들이 섞여 있다. 이게 올드쿼터의 멋이로군.


지도를 보지 말고 내키는 대로 걷기를 잘했다. 나는 오래된 골목들을 헤매고 싶었다. 그러나 인형극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괜찮다, 올드 쿼터를 걸어다닐 날은 많이 남았다. 그나저나 나 길을 너무 잘 건넌다. 이젠 거의 현지인 수준이야. 오 살아있네!


탕롱 수상인형극


인형극 시작 10분 전에 도착했다. 자리는 앞에서 두 번째 줄. 완벽한 일등석이다. 무대엔 물이 가득했다. 울긋불긋한 조명이 위에서 쏟아졌다. 무대 위 양 옆에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하는 단원들이 앉았다. 인형극은 여러 개의 테마로 구성되었다. 용춤을 추고 물소를 기르고 개구리를 잡고 낚시를 하고 금의환향을 한다. 농경사회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투박한 인형들이 넘어지고 엎어질 때마다 관객들은 웃음이 빵빵 터졌다. 오직 베트남 관관객에 한해서. 참 쉽게 잘 웃는 사람들이다. 내 옆에 한국 아저씨 두 명이 앉았는데 (당연히 모르는 사이) 총 한국인 세 명은 전혀 웃지 않았다. 어느 포인트가 웃기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다. 인형극은 몸짓만으로도 대충 이해가 되었다. 정말 웃기지가 않았다. 우리 뿐 아니라 주변의 외국인은 하나도 웃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아이러니가 웃겼다. 결국 웃기긴 했네.


인형극 내용보다 전통 악기가 연주하는 선율과 직접 부르는 노래가 아름다웠다. 이런 걸 직관이라고 하던가. 아마 녹음본을 들었다면 '이런 게 베트남 전통 음악이군' 하고 흘려버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굳이 연주회나 콘서트를 찾아가는 이유를 알겠다.   


단원들은 최소 50대 이상으로 나이가 지긋했다. 그들은 노래하고 대사를 치고 연주를 하는 일인삼역을 담당했다.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탤런트였다. 표정과 몸짓에서 자부심과 연륜이 묻어 나왔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 뒤에서 인형을 조종하는 배우들이 나와 인사를 했다. 모두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허리부터 완전히 물에 잠겨 있었다. 한 시간을 젖은 채로 공연하는 것이다. 자기 인형과 혼연일체가 되었달까. 


밖엔 관광버스와 단체 관광객이 바글바글했다. 아까보다 훨씬 붐비고 정신이 없었다. 매표소 직원 실수가 오히려 득이 된 셈이다. 하긴 여행에서 실패란 없으니까. 무엇을 경험하든 경험한 자체로 이미 완벽하니까.   




<연재 브런치북>

월, 화, 수 : 얼떨결에 시엄마

목, 금, 토, 일: 베트남이 춥다니요


<완결 브런치북>

그래서, 베트남

중년에 떠나는 첫 번째 배낭여행

유방암 경험자입니다만

제주살이는 아무나 하나

무작정 제주, 숲길과 오름

딱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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