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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Mar 09. 2024

길거리 목욕탕 의자를 좋아합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이 이보다 쉬울 순 없었다. 좀 편해보자고 클룩에 픽업 서비스를 예약해 놓았다. 내 이름을 들고 서있는 기사님을 찾아 차에 타면 끝. 바가지를 씌우거나 거스름돈이 없다고 잡아떼거나 길을 잘못 든 척하는, 예전에 흔히 겪었던 사기성 사건을 원천봉쇄한다. 


늦은 밤 낯선 공항에 도착하는 여행자에겐 마음이 놓이는 출발이다. 고생을 더는 만큼 나중에 떠벌일 에피소드가 줄어드는 반작용이 있지만 말이다. 하노이의 공기는 따뜻해서 땀이 날 지경이었다. 한밤에 이렇게 포근하다고? 나는 입고 온 경량 패당을 벗었다. 겨울옷이 어울리지 않는 날씨였다.     


젊은 기사는 길 가에 나를 내려주었다. 미리 전화를 받은 호텔 직원이 마중을 나왔다. 골목이 좁아서 차가 들어갈 수 없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래봐야 3분 남짓이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섰다. 넓고 깨끗하다. 어느새 12시. 얼른 씻고 자고 싶을 뿐. 이런, 클렌징 폼이 어디 갔나? 분명히 가방 옆에 두었는데 어째서 빼먹었을까. 욕실의 작은 비누로 대충 닦고 침대로 들어갔다.


윙윙. 잠깐의 고요. 다시 윙윙윙. 잠깐의 고요. 또 윙윙윙윙. 꿈인가 했지만 귀를 파고드는 소리는 현실이었다. 겨우 새벽 4시.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약 올리듯 시끄러웠다 조용했다를 반복했다. 일어나서 불을 켜고 방을 둘러보았다. 이상 무. 진원지는 창문 밖이었다. 아래층 벽에 달린 (에어컨 겸 히터의) 실외기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새벽에 기온이 떨어지니까 아래층 방에서 히터를 튼 모양이다. 히터는 원래 돌아가다가 멈췄다가 하면서 작동한다. 대로변 소음을 피하려고 일부러 골목에 박힌 숙소를 골랐건만. 낡은 기계는 방음이 안 되는 창문을 가뿐히 무시했다. 되는대로 고함을 질러댔다. 참다못한 나는 아침 6시에 리셉션 직원을 불렀다.


어젯밤 그 남자다. 그는 조금 귀찮은 얼굴이었다. 밤새 카운터에서 졸다가 올라온 게 분명했다. 소음을 확인시키고 오늘밤엔 방을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불편을 끼쳐 미안하다는 말과 달리 요청을 거절했다.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식인가. 가능한지 알아보지도 않고 대뜸 안 된다고?


나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어, 청년. 당신 무려 5일이나 예약한 손님을 홀대하는 거라고. 일단 나는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방은 이따가 다시 해결을 보면 된다, 너 말고 니 윗사람과.  



숙소에서 주는 조식은 간단한 과일과 닭고기 쌀국수. 내가 좋아하는 용과가 있어 반가웠다. 쌀국수 위에 푸짐하게 올라간 닭고기 살과 담백한 국물이 입맛에 맞았다. 쌀국수를 먹고 실망하는 일은 나에게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거리를 탐색할 시간이다. 하노이의 명소, 호안끼엠 호수가 코앞이었다.




제일 먼저 호수 앞에 붙은 탕롱 수상인형극장을 찾아갔다. 호수를 한 바퀴 걷고 나서 올드 쿼터를 돌아다닌 후, 저녁때쯤 인형극을 볼 생각이었다. 6시 30분 표를 달랬는데 호쾌하게 내민 표엔 3시라고 적혀있다. 두 시각 사이 어느 대목에서 오해가 생긴 걸까. 누구의 잘못인지 따져 무엇하리. 그냥 낮에 보지 뭐.


엇 저건 목욕탕 의자닷! 극장 건너 카페에서 길에 내놓은 손님용 좌석이었다. 등받이 없는 자그마한 플라스틱 의자에 나는 항상 매료된다. 독특한 취향이라고 놀려도 별 수 없다. 현지인들 틈에 끼어 궁둥이를 붙이면 긴장이 풀리거든. 베트남이라는 나라 안으로 한 발을 쑥 집어넣는 느낌이랄까. 본격적으로 여행에 뛰어들라는 신호탄처럼 느껴진다. 호수보다 의자가 먼저 나를 잡아끌었다.



내가 지고 의자가 이겼다. 아침엔 길거리 커피부터 마셔주는 게 베트남 여행의 정석 아니겠어. 이미 자리를 차지한 일고여덟 명의 아줌마 무리 옆에 앉았다. 작은 허리 가방을 배에 찬 그들이 관광객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기엔 옷차림에 멋을 냈고 관광객치곤 허리의 일수 가방이 어울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여자들은 신나게 웃고 떠들었다.


커피는 정신이 번쩍 들도록 달고 진했다. 잠을 설쳐 멍했던 머리가 깨어났다. 김혜자가 된장찌개를 음미하듯 속으로 '이게 로컬의 맛이야'를 되뇌었다. 순간 옆 자리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다른 건 몰라도 '신짜오!'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오. 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나의 신짜오를 들은 그녀가 손짓과 함께 뭐라고 길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중간에 섞인 '한꿕'이란 단어를 용케 알아들었다. 베트남 말로 '한국'이다. "한꿕, 코리안!" 내가 대답하자 이번엔 여러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꺼번에 말을 쏟아내었다. 와중에 '호텔' 어쩌고 하길래 눈치를 챘다. 내 호텔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이었다.


"My hotel is over there!" 손가락으로 저 건너 골목을 가리켰다. 그들은 아하 알아들었다는 표정이다. 오 나의 선택적 리스닝 능력이 먹힌다! 만족에 겨워 나는 뒤돌아서서 음흉하게 웃고 싶었다. 실제론 예의 바른 표정으로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모르는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는 것. 통할지 안 통할지 모르는 대화를 시도하는 것. 말 한마디와 사소한 몸짓에 즐거워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동시에 무언가가 되기도 하는, 가벼운 인연이 나는 참으로 기껍다. 그런 순간을 만나기 위해 또는 만들기 위해 매번 여행을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행지에서 사람들과 나를, 도시와 나를 연결시키는 행위는 결코 대단하지 않다. 말하자면 가늘고 여린 끈에 불과하다. 그러나 반복될수록 거미줄처럼 끈끈해진다. 목욕탕 의자에 앉아서 나는 하노이 여행의 행운을 점쳤다. 새벽의 소음과 무성의한 직원 따위는 벌써 잊었다.




<연재 브런치북>

화요일: 얼떨결에 시엄마

토요일: 베트남이 춥다니요


<완결 브런치북>

그래서, 베트남

중년에 떠나는 첫 번째 배낭여행

유방암 경험자입니다만

제주살이는 아무나 하나

무작정 제주, 숲길과 오름

딱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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