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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질문, 나와 너희를 울리는

통제욕구가 강한 선생이 중학생에게 열린 질문을 던지는 이유

by 둥리지

나는 통제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내가 계획한 방향대로 수업이 물 흐르듯 흘러갈 때 희열을 느끼고, 돌다리 놓듯 조심조심 설계해 둔 수업 속 장치를 학생들이 차근차근 밟아가며 학습목표에 도달할 때 만족감을 느낀다. 상상보다는 추론에 능숙하고, 그야말로 현실에 두 발 딱 붙이고 사는 사람. 중력으로부터 벗어날 마음이 그다지 없는 사람이 바로 나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효용이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역시 나의 특징이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앞서 설명한 나의 특징과 상통하는 면일지도 모른다. 내가 계획한 바가 학생들에게 잘 전달되었는지 확인하는 것. 나는 꽤 괜찮았다고 생각한 이 수업이, 그들에게도 유의미했는지 알고픈 마음.


그 마음은 질문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에게 열린 질문을 던졌다. 창의력과 상상의 날개 대신, 우리가 함께 읽은 텍스트가 너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다. 너도 주인공처럼 울던 날이 있었냐고, 그런 날 너는 어떤 마음으로 눈물을 닦고 무사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냐고 물었다. 질문에 답하는 데 능숙해진 학생들에게는 스스로 질문을 만들도록 했다. 작품과 관련해서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은 질문을 만들어볼 것을 요구했다. 작품 속에서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어야 하지만, 물음표의 출발은 작품이어야 한다는 단서와 함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답을 내려야 하는 질문일수록, 말보다는 글로 답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에.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담아 답해야 하는 질문은 늘 종이에 담아 전달한다. 학습지로, 때로는 수업 일지로 아이들에게 질문을 제공한다.


과연 아이들이 충실하게 답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확신의 끄덕임으로 답하겠다. 집요하게 캐묻는 선생님보다는 보고도 못 본 척 눈감아주는 동네 어른을 더 편안해한다고 생각했던 이 아이들이, 물음표 앞에서 이렇게도 과감히 마음의 문을 열어젖힐 줄 나도 몰랐다. 본인도 이런 적이 있었다고, 학급 분위기는 너무 좋은데 자기만 겉도는 모습을 볼 때면 자기가 미워진다는 말을 아이들은 적어낸다. 일기장이 아닌 학습지에, 인스타그램이 아닌 수업 일지에 적는다. 그것도 아주 빼곡하게.


아이들의 묵직한 생각이 담긴 학습지를 걷어와 교무실에서 혼자 읽어 내려가는 시간은 늘 경건하다. 떨리는 마음으로 학습지를 넘긴다. 갱지에 인쇄된 물음표 앞에서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다짐한 열다섯 살의 아이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대할 수는 없다. 예의를 갖추고 아이들의 생각을 좇아간다.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은 밑줄을 그어 가며 아이들의 생각을 따라간다.


마음속 생각을 한 문단의 글로 적어낸 아이들은 머릿속이 가벼워졌을까 혹은 더 무거워졌을까.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 기쁠까, 아니면 모르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어 불편할까. 그것은 내가 알 수도 없을뿐더러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이들에게 마침표 대신 물음표를 권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두서없이 답을 쏟아낼 것 같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서, 나의 물음표를 바탕으로 마침표를 스스로 찍을 수 있으면 좋겠어서, 글 너머에 있는 의미를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서.


아이들에게 어떤 글이, 나의 수업이 주는 의미를 조금은 알고 넘어가고 싶어서라는, 교수자인 나를 위한 이유 역시 여전히 살아있는데 그것을 숨길 마음은 없다. 속닥거리며 비밀을 공유하듯 아이들의 마음속을 슬쩍 들여다보는 것, 아이들이 적어낸 문장 한 줄에 하루 종일 마음이 벅차오르는 경험을 하는 것, 아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달아올라 한동안 다정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볼 수 있는 것.


이 정도의 기쁨은, 교사의 삶에 포함된 보너스라고 해 둘까.




이번 주에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용기를 다룬 소설을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교과서에 실린 지문인데, 이 작품 혹은 주제를 한 번 더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움, 고백, 용기. 윤동주 시인이 떠올랐다. 학생들과 시인이 등 뒤에 두었던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소설 속 주인공과 시인이 말하는 부끄러움과 자기부정, 용기와 고백의 결은 다르지만 그 차이마저도 맛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윤동주 시인의 작품을 함께 나눴다.


아이들에게 주제와 관련하여 질문을 만들어보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한참 고민하며 질문을 만든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물음표 여러 개를 지나다 보면 심장이 쿵 울리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어떨 때 가엾어질까."

"우리 스스로가 미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미워하던 사나이는 본인을 용서했을까."


열다섯의 아이들이 적어낸 이 질문을, 몇 번을 고쳐 쓴 흔적이 보이는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이 꼭 '나는 나를 미워해본 적이 있어'라는 고백처럼 들려서, '나는 내가 때로는 가엾기도 해'라는 속삭임처럼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쉽게 밑줄을 그을 수도 없고, 참 좋은 질문이라는 상투적인 답변을 달 수도 없는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너희가 던진 물음표는 분명 너희를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줄 거라고. 그 길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함께 하겠다고. 그리고 그 물음표가 결국 마침표로 바뀌는 날, 너희가 한 차원 더 높아지는 날이 있다면 그날은 분명 너희가 물음표 앞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애쓴 덕분일 거라고. 그 시간 속에서 잠깐이나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있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열다섯이 묻는다, 우리 스스로가 미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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