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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수능 감독

초록 물결이 톡톡 튀는 젊음처럼

by 둥리지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은 새벽, 서둘러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튼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god의 <촛불 하나>. 잠을 설친 탓일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럴까, 핸들 위 손을 가만 두지 못하고 손가락을 쉴 새 없이 까딱거리는 것은 달뜬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고. 마음 좀 식히려고 창밖을 내다 보니 차가 점점 막히기 시작한다. 슬슬 다 와간다는 뜻이다.


달려오는 차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저 차 안에 수험생이 타 있는지 아닌지.


잠깐 차 세울 곳을 찾기 위해 깜빡이를 켜고 우왕좌왕하는 차, 회색 트레이닝바지에 후드티를 뒤집어쓴 아이를 내려 주고도 한참을 멈춰 서 있는 차, 정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어쩔 수 없이 아이만 내려 주고는 얼마 못 가 깜빡이를 켜고 멈추는 차.


임시 정차할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차 뒤에 선 나는 잠시 동안 기다린다. 평소 같았으면 얼른 차선을 바꿨을 테지만, 오늘은 기다린다. 뜨거운 응원을 건네는 부모와 얼른 가라며 재촉하는 아이의 대화가 오가고 있을 차 뒤에서 가만 기다린다.


수능 종사요원이라는 표식을 확인받은 뒤 교문을 통과하면, 저벅저벅 학교로 걸어 올라가는 아이들이 보인다. 회색 트레이닝복에 검은색 후드티, 하얀 패딩에 검은색 바지, 크록스와 운동화, 큰 백팩과 도시락 가방. 해뜨기 전부터 해 지기 직전까지 하루 꼬박 읽고 보고 먹고 덮을 것들을 짊어지고 출입구로 향하는 수험생들. 평소 등굣길과는 다른 표정으로, 어쩌면 일 년 내내 지었을 그 표정으로 새벽 공기를 뚫고 온 교실에 불이 들어와 있는 수험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들을 한참 바라본다.






정확히 7년 만에 다녀온 수능 감독이었다. 연이은 임신 출산과 휴직으로 그간 감독을 쉬었다가 오랜만에 수능 감독을 가려니 꽤나 긴장이 됐다. 한국사가 없던 시절, 수능 감독의 의자도 없던 시절에 감독을 한 게 마지막인 탓에 몇 번이고 감독 매뉴얼을 뒤적이는데도, 자꾸만 수험생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을 바라보며 떠올린다. 15년 전 이 자리에 앉아있던 나를, 10년 전 이 자리에 두 번 앉아야 했던 내 동생을. 탐구영역 4과목을 보던 시절, 제2외국어까지 응시하고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귀가해도 좋다는 말을 듣고 학교를 빠져나오던 그날 그 시간의 하늘을. 교문 앞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던 어른들 사이에서 나의 엄마 아빠와 눈이 딱 마주치던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던 그 순간을.


시험장에 앉아있을 나의 학생들을 함께 떠올린다. 휴직 직전, 중학교에서 졸업시켰던 아이들이 올해 열아홉 살이다. 수능 시험장에 처음 앉아 보는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 둘 떠올린다. 잘 해냈으면, 많이 떨지 않고 잘 해냈으면, 쉽게 엎드려버리지 않았으면,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는 멋진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시선을 돌려 오늘의 시험장을 다시 둘러본다. 시계가 멈출까 봐 손목시계 두 개를 챙겨 온 학생을, 평소 가장 좋아하는 맛으로 챙겨 왔을 책상 위 초콜릿을, 학생들이 매 시간 정자로 적어 넣는 필적 확인 문구를, 수학 시간에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는 학생들이 보여주는 제각각의 습관들을 바라보며 상상한다. 어떤 꿈을 가지고 있을까, 몇 번이고 이곳에 앉았을 저 수험생은 오늘 어떤 표정으로 집에 돌아갈까, 오늘 아침 누구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을까.






하지만 이런 '교사스러운' 생각만으로 100분을 채울 수는 없다. 감독 끝나고 가는 길에 저녁을 먹고 들어갈까, 얼른 집에 가서 아침에 못 보고 나온 애들을 30분 더 볼까 고민하다가. 나만의 위시 리스트를 떠올려도 보고, 매뉴얼 뒷장을 펼쳐 달력을 그려 넣고는 연말연초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다가올 지필평가에 출제할 문제도 구상하다가, 내년에 혹시 할지도 모르는 이사를 대비해 새집 인테리어도 구상했다가. 영역을 넘나드는 상상과 계획이 날개를 달고 활개 칠 때쯤 시험 시간 10분 남았다는 종소리가 들리면 다시 시선을 학생들의 손끝에 둔다.


답안지에 마킹하는 손길과 안 풀리는 문제를 붙들고 끝까지 씨름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종이 치기 직전에 화이트로 답안을 수정하는 학생의 초조함에 눈을 맞춘다. 종이 울리기 전에 무사히 마킹을 마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손끝을 바라본다.


종이 울리고 책상 아래로 내려놓은 그들의 손은, 마치 기도하는 손 같다.


출처:조선일보 기사 https://www.chosun.com/national/education/2025/11/13/SPUNCXVSINCVHOT4UFTOFVTAB4/



초록 물결이 톡톡 튀는 젊음처럼. 올해 수능 필적 확인 문구는 안규례 시인의 시 ‘아침산책’ 속 한 구절이었다. 주로 수험생을 향한 응원을 담은 메시지로 선정한다는 이 필적 문구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몸뚱이만 한 백팩을 울러 메고 홀로 교문을 통과해 온전히 하루를 다 바친 오늘이 가고, 캐롤이 흐르는 연말과 새해 그리고 여전히 싸늘한 3월의 아침 공기를 지나 연두와 초록이 대학 캠퍼스를 덮어버리는 그 계절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4월의 어느 날, 연둣빛이 예쁜 계절과 색색의 과잠을 입은 대학생들이 전공책을 들고 건물을 오가는 낮 시간의 분주함이 어서 이들의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 계절의 온기와 소란이, 초록의 물결이,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한 이들에게 부디 무사히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안녕하세요, 2학기 복직 이후 첫 글을 올립니다.


두 아이 엄마 노릇하며 출근하는 건 처음이라는 핑계로

글 올리기를 멈추고 숨어 지내는 사이에 계절이 바뀌었어요.

써야 하는데, 써야 하는데 하면서도 바쁘다는 이유로,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거라는 방어 심리로, 체력 고갈이라는 반박 불가의 사유로 '쓰는 삶'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어요.


그런데 어제 결시자 한 명 없는 교실에서 수능 감독을 하고 있자니, 오늘이다,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어떤 핑계로도 도망칠 수 없는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조금 부끄러워지는 순간.

이 마음을 잊으면 안 될 것 같아 어서 글을 쓰고 싶어지는 순간.


그 마음이 온갖 핑계 속으로 도망쳐버리기 전에, 얼른 글을 올립니다.


('초록 물결'의 힘은 이리도 강력하네요. 지켜보고 있었을 뿐인데, 글이 쓰고 싶어지다니 말이죠. 빼지 말고 매년 가야겠습니다, 수능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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