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느리게 가기-1

ㅡ 생애 첫 수학학원도전기.

by Anne

늦은 밤. 아니. 새벽.

내일 아침을 간단히 준비해 놓고 주방을 정리하고 씻고 누웠다. 자기 전에 보는 핸드폰은 숙면을 방해한다고 보지 않는 것을 권하지만, 요즘 나는 자기 전에 휴대폰 갤러리 속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 사진이나 동영상을 졸릴 때까지 찾아보다가 잠이 든다. 내 키보다 커버린 아이들을 보고 있어도 배부르긴 한데, 휴대폰 속 꼬맹이들은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아이들 어릴 때 영어유치원을 보내긴 했지만, 방과 후 프로그램은 참여하지 않았다. 방과 후는 거의 국어나 영어, 수학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유치원프로그램 이외의 심화는 필요 없다 생각해서였다. 유치원선생님들과 주변엄마들은 그러면 안 될 텐데... 하셨지만, 내 나름의 방식으로 고집으로 그렇게 했었다.

솔직히 유치원비용 이외에 추가비용도 부담이기도 했고, 5-7세 아이들이 방과 후까지 하고 오면 하루가 다 끝나는데 그럼 언제 놀까... 싶어서 그랬다. 그 돈이면 그냥 놀이동산 연간회원권을 사는 게 낫겠다 싶었다.

초등학교를 가서도 초저학년까지는 특별한 공부학원을 보내지 않았다. 학교에서 하는 외국인 영어회화수업을 재미있어해서 시켜주었고, 악기를 배우거나 만들기 수업, 배드민턴등 예체능만 시켜주고 공부는 집에서 책 읽고 일기 쓰고 가정학습지로만 했다.


마침 동네에 맘 맞는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랑 둘이 아이들 유치원, 학교 마치는 시간에 바로 픽업해서 날마다 에버랜드에 가서 놀다온건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아이들도 수년간 동물원에서 보고 싶은 동물 실컷보고 꽃구경하고 키가 점점자라 탈 수 있는 놀이기구가 점점 많아지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몇 년은 실컷 놀았던 것 같다.


큰아이가 4학년쯤 되었나...

학교를 다녀오면 가방을 던져놓고 자전거나 롤러블레이드 아니면 킥보드 같은 걸 들고나가서 해지면 들어오던 녀석이

"엄마! 나도 수학학원 보내주세요. 친구들 다 거기 가는데 나도 그 노란 버스 타고 가고 싶어요." 하는 거다.


더 놀아야 하는데 놀아도 될 것 같은데 학원을 보내달라고 하니 그럼 상담이나 좀 받아볼까 하고 아이들이 많이 다닌다는 학원을 찾아갔다. 전화로 먼저 상담을 예약하려는데 상담선생님이 시험을 본다고 한다.

"네? 시험이요? 무슨 시험을 보나요?"

"네. 어머니 우리 아이 몇 학년이죠? 네에, 4학년이면 4학년시험을 보면 되겠네요. 직전 1학기와 다음 1학기 총 3개 학기 시험을 볼 수 있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

나는 그냥 학원은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레벨테스트를 먼저 보고 다시 상담을 한다는 거다. 수준이 맞지 않고 반이 없을 수도 있다는 말과 함께.

사실 모르는 걸 배우러 가는 건데 반이 없다는 말은 또 무슨 소리인가 싶기도 하고, 한 번도 시간을 정해놓고 문제를 푼 적이 없는 아이에게 시험을 봐야 한다는데 그래도 가겠냐고 하니까 계속 가겠다고 하는 거다.

어쩔 수 없이 예약을 하고 선행은 되어있지 않으니 시험은 4학년 것만 보고 이전학기를 보겠다고 했다.

아이는 노란 버스를 탈 생각에 신이 났는데 나는 괜히 잠을 못 이루고 맘카페에서 그 수학학원후기를 열심히 뒤져보다 겨우 잠이 들었다.

대망의 시험날 아이는 신나서 학원입구를 들어가고 간단한 상담 후 아이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 대기공간에 앉아 기다렸다.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 까불이가 30분씩 두 번 어떻게 시험을 치르나 이 녀석이 시험이란 걸 쳐본 적이 없는데 뭘 하고 나오려나 혹시 중간에 뛰쳐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이. 들어오세요. ㅇㅇ아 너도 같이 들어와."

상냥한 상담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머니. 우리 ㅇㅇ이가 수학을 참 잘하네요. 선행은 되어있지 않지만 두 개 시험지 모두 1-2개 밖에 틀리지 않았어요. 꽤 어려웠을 텐데요." 하시는 거다.

솔직히 난 좀 놀랬다. '그럴 리가... 가정 학습지를 하긴 했지만, 뭐 특별히 한건 없는데... 얘 천젠가?!

나는 순간 친절한 상담선생님의 말에 카드를 들어 결제 할 뻔 했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이 일정을 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이와 좀 더 상의해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사실 반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험을 잘 봤다고 하니 순간 그냥 시킬까 하던걸 겨우 접고 돌아왔다.

아들 녀석은 노란 버스를 타게 됐다고 신나 했지만, 노란 버스를 타려면 일주일에 3일은 타야 하고 숙제도 많고 밖에서 노는 시간은 줄어들 거라고 말해주었다.

아들 녀석은 저녁 먹는 내내 고민을 하더니 자기 전에

"그냥 엄마랑 공부 좀 더 할게요. 버스는 다음에 타지머."


그렇게 첫 수학학원 도전을 시작으로 나도 어쩔 수 없이 공부경쟁에 발을 들였다. 이것이 시작일지 끝일지. 끝이 어딘지도 모를 시작이었다.





느리게 가기 -2 편에 마침내 들어가게 된 수학학원과 느리게 가기 위한 엄마의 고군분투를 더 풀어보려고 합니다.


[아이둘과 틈나는대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자주 다녔다.

큰아이는 체험형 박물관은 좋아했는데 미술관은 별로 재미있어하지는 않고 그냥 따라만 다녔는데 작은아이가 작품보는걸 좋아하고 제법 감상도 잘 하고 해서 지금까지도 자주 다닌다. 위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건희컬렉션으로 전시되었던 소장품이다. ]

keyword
이전 04화루틴 만들어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