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정수 Jan 27. 2019

시립박물관이라 쓰고 놀이터라 읽는다

헬싱키 시립박물관 Helsinki City Museum

서울에는 시립 박물관이 하나 있다. 광화문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이다. 국립중앙박물관도 주요 문화재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 관련 전시에 특화되어 있다. 요컨대, 박물관은 곧  '유물 전시관'이다.


헬싱키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헬싱키 시립박물관의 어린이 공간(children's town)은 차라리 놀이터에 가깝다. 교육프로그램이 딱히 체계적으로 짜여있지도 않고, 뭔가 굉장히 오래된 것이 전시되어있지도 않다. 글씨가 가득 적힌 안내문도 없고, 들고 간 수첩에 베껴야 할 것 같은 지식도 없다. 대신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 옛적 헬싱키로 돌아가, 그때의 아이들이 된 것처럼 무엇이든 만지고 입고 던지며 놀 수 있는 소박한 공간이다. 새로운 전시물품을 들여오고 첨단 시스템을 활용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에 늘 전전긍긍한 국내 박물관들이 좋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을 공간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헬싱키 타임머신'


1757년에 지어진, 헬싱키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바로 헬싱키 시립박물관이다. 2016년에 문 연 어린이 공간(Children’s Town)은 일주일 내내 무료로 문을 여는, 오로지 꼬마들을 위한 환상의 공간이다. 손 닿는 것은 무엇이든 만져도 된다.

헬싱키 시립박물관 건물은 늘 아이들과 부모로 북적북적하다.


2층에 있는 꼬마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직전, 박물관 건물을 세운 요한 세더홀름(Johan Sederholm 1722-1805)의 유물들을 구경할 수 있다.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큰돈을 번 요한 세더홀름은 성공을 기념하며 이 멋진 건물을 지었다. 세더홀름 씨의 상점이 있던 1층은 전시관으로, 가족들이 살던 2층은 어린이 타운으로 변신했다.


왼쪽은 처음 건물이 지어졌을 때의 모습. 중간은 세더홀름씨가 어렸을 적 쓰던 물건과 장난감, 오른쪽은 재혼했을 때의 문서.

건물주의 젊은 시절을 보여주는 물건들은 모두 1인칭으로 설명이 쓰여있다. "내가 16살 때, 나는 alderman(높으신 분. 고위직 공무원 또는 상급 의원) Bock의 가게에서 일했어요. 땔 나무를 패고, 방을 덥히고, 말을 돌보는 게 제 일이었죠" 같은 내용이다. 세더홀름 씨는 나중에 자신의 가게를 차렸고, 자신의 배도 소유했다. 어린이 타운에 있는 18세기의 장난감들이 어떻게 그렇게 다채롭고 잘 보존되어있을까? 세더홀름 씨가 자기 가게에서 팔았던 물건이기 때문이다ㅎㅎ




무엇이든 되어 볼 수 있는 곳


어린이 타운에 도착하면 방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넘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푹신한 바닥을 깔아 둔 곳에는 나무판자를 따라 돌아다니며 마차에 풀쩍 올라타 볼 수 있다. 항구도시인 헬싱키답게, 배에도 올라서 방향키를 잡아봐야 한다. 벽면 디자인 등은 다소 촌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그 시절 사람들의 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했다. 천장의 조명 배치나 다른 체험용 전시물품에도 하나하나 디테일이 살아있다.


모래바닥 대신 푹신한 갈색 스펀지가 깔려있다. 식료품점에 가면 소시지와 생선이 있다. 만져보면  뜨악, 할만큼 탱글탱글하다.


두 공간 사이에는 구두장이의 작은 집이 있다. 벽에는 가죽이, 천장에는 구두를 만들 때 쓰는 여러 가지 모양의 구두골(shoe tree)이 매달려있다. 구두골이 무엇인지 몰라도, 바닥에 놓인 예쁜 신발들을 보면 '아, 이걸 안에 넣고 겉에 가죽을 싸서 모양을 만드는 거구나' 누구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옆 방으로 가면 이번에는 그럴듯한 무대가 있다. 무대에 핀 조명이 꽂히는 가운데, 꽤나 정교하게 생긴 샹들리에와 커튼까지 있다. 바구니엔 무대용 의상(?)과 손에 끼우는 인형들,  역할카드가 있다. 벽면에는 작은 설명이 있다. 

"외국의 극단이 헬싱키에 도착했어요. 배우들은 마차 보관소와 헛간, 부잣집에서 공연을 하네요. 여러분도 연기를 하거나 인형극을 할 수 있어요. 장난감을 다 쓴 뒤에는 원래 자리에 돌려놓아주세요!" 


과거가 아니라 현재형 문장으로 써둔 점이 얼마나 섬세한가. 아이들은 과거 사람들이 이랬구나, 를 보는 게 아니라 정말 과거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본을 뜰 때 쓰는 도구들과 재봉틀, 옛날 스타일의 옷걸이도 있다. 봉을 꺼내볼 수도 있고, 걸려있는 옷들을 입어봐도 된다. 1970대의 '할머니 집' 공간에서는 TV에서 그 시절 유행했던 쇼가 틀어져 나온다고 한다. 주말에는 정말로 박물관에서 일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여기에 친히 상주해 계신다


마냥 옛날 직업 체험의 장소이기만 한 건 아니다. 수납장 안에는 정말 제대로 만들어진 인체 부분의 모형과 동물 뼈 모형이 가득 들어있다. 물론 열어서 꺼내서 활용하라고 넣어놓은 것 들이다. 현미경과 암석 표본, 옛날 스타일의 플라스크 등 생물뿐 아니라 물리 화학 지구과학 선생님 놀이를 전부 다 할 수 있다. '선생님 놀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수납장 바로 옆에는 '교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가장 사랑스러웠던 풍경은, 아이들이 부모님과 어른들을 학생 자리에 앉혀놓고 선생님 노릇을 하고 있는 교실이었다. 1930년대 스타일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정말 선생님이 된 것처럼 진지하게 '따라 해 보세요' 하며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과,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지켜보면서도 간섭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학생 역할을 충실히 하는 부모님들.


인터넷으로 사전 접수해서 시간대 맞춰 찾아가야 하는 1시간짜리 '체험 프로그램' 아무리 만들어봐야,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옛날 친구들은 이렇게 놀았어요" 하고 유리장 안에 가둬둔 장난감과 흑백 영상을 아무리 보여줘도 이보다 재미있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실컷 알아서 놀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헬싱키 시립박물관 어린이타운의 모습이었다.




리얼하게 담아낸 옛날 또래들의 모습


비교적 '박물관스럽게' 생긴 공간들도 있다. 흑백 사진으로 가득한 이 곳은, 그때 그 시절 헬싱키 어린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았다. 벽면에는 산에서 들에서 뛰놀거나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가운데에는 그들이 가지고 놀던 실제 장난감들이 시대별로 전시되어있다.

 


사랑스러운 미니어처 아파트는 좋아하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집과 '눈높이가' 맞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인기가 좋다. 가운데의 아파트는 방마다 다르게 꾸며져 있는데, 유리로 가두어두지 않아서 직접 들여다볼 수도 있다. 섬세한 가구들을 다양한 배치로 구성한 데다, 벽지도 모두 다르다. 아파트 주변에는 직접 밀어볼 수 있는 장난감 자동차와 도로가, 또 다른 편에는 비교적 거대하게 만든 미니어처 '주택'이 있어 하나하나 뜯어보는 재미가 있다.


타임머신 입구에 있는 세 개의 날짜는 각각 두 개의 VR기기와 빔프로젝터로 사진을 보여주는 한개의 벽면에서 체험할 수 있다.


VR을 활용해 특정 시점의 과거 헬싱키 시내를 360도 돌아보는 체험을 할 수 있는 '타임머신', 헬싱키 근대 유물(?)들이 전시된 '헬싱키 바이트' 등 1층 상설전시들도 퀄리티가 좋았다.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카페도 분위기가 편안하다. 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전시정보를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헬싱키의 과거 모습을 담은 사진 무려 5만여 장을 무료로 열람하고 다운로드할 수도 있다.

이전 13화 '보통 핀란드인'의 '보통의' 주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