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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정수 Sep 02. 2018

'보통 핀란드인'의 '보통의' 주말

시간이란 가족과 아름다움, 편안함을 위한 것

일반적인 가정의 삶, 일반적인 집,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일반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했던 2박 3일간의 여름 주말, 한국 같은 다이내믹함은 느낄 수 없었지만, 한국에 없던 여유를 만끽했다. 이 곳에서 가장 실감할 수 있었던 차이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여가를 훌륭하게 보내고, 어떻게 내 주변을 아름답게 정리하고, 어떻게 내 가족과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묵었던 큰아들(?) 방. 아티스틱한 인테리어때문에 넋을 놓았다


부모님(한나마이야 씨와 미코 씨 부부)과 두 대학생 자녀로 이뤄진 가족이 사는 집은 헬싱키 중심에서 버스로 20~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자전거로 불과 10분 거리에 아름다운 해안이 있는 곳. 모든 벽에 그림이 걸려있고, 모든 창가에 식물이 자라고, 모든 공용공간에 빼곡한 책장이 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집이었다. 흰색 벽과 절제된 가구 색상, 푸른 화초, 마리메코 이불과 수건 등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북유럽 인테리어'라는 것이 오히려 더욱 신기했다.


왼쪽은 거실. 오른쪽은 TV룸(?) 간만에 삼성제품 발견


여름에는 밤이 끝나지 않을 정도로 해가 길지만, 겨울에는 정 반대다. 한 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겨울에는 해가 낮에 떠서 낮에 진다. 해를 받기 위해 벽마다 창을 냈지만, 추위를 막기 위해 모두 이중으로 되어있다. 우리나라처럼 집안에서는 신발을 벗는다. 주로 신발을 벗고 양말만 신거나 아니면 맨발에 슬리퍼를 신는 문화다. 멋모르고 구둣발로 성큼성큼 들어가면 실례가 될 수 있다.

 

다소 과하게 필터가 들어갔지만 거의 이정도 수준으로 예뻤던 첫날 저녁 노을..과 인근 카페에서 먹은 초대형 아이스크림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주말에는 운동을 하거나 공연, 전시를 보러 간다. 아침에는 집으로 배달된 지역신문을 읽으며 식사를 하고, 자기 전에는 과일이나 요거트같은 간단한 간식을 먹는다. 빡빡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가족들은 내게 고맙게도 "꼭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말고, 가만히 있고 싶으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쉬어도 된다. 그게 우리 가족의 방식"이라며 '휴식'을 베풀었다.


가까운 해안은 서핑이나 수영을 하는 사람들도 가득했다. 겨울에는 꽁꽁 얼어서 사람들이 심지어 스케이트나 스키를 타기도 한다. 이 해안 근처에 있는 고급 호텔이 바로 최근 미국과 러시아의 정상회담 당시 트럼프와 푸틴 대통령이 머물렀던 곳이다. 너무나 평화로운 곳이 갑자기 경찰과 경비 인력으로 북적거려 무척이나 낯설었다고 한다.

 



한나마이야 씨는 조그만 텃밭에서 샐러드 채소와 양파, 콩, 베리 등등을 기른다. 올해는 가물어서 다들 바짝 말라있다.


토요일 아침에는 자전거를 타고 한나마이야 씨의 가족농장을 구경 갔다. 헬싱키 시에서 관리하는 땅을 조그맣게 나눠 미니 텃밭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손바닥만 한 밭 다섯 개에 샐러드 채소와 감자, 콩, 쥬키니 호박, 베리, 당근, 순무, 양파, 마늘 등 별 별것들이 다 자라고 있었다. 1년 이용료는 35유로. 작은 공간이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공간에 나무도 심고 꽃도 심는다.

 

정원처럼 잘 가꿔진 농장들도 있다. 예쁘게 영근 미니 사과와 꽃으로 가득한 농장
오늘의 수확을 담은 자전거 가방. 양파 사이즈가 정말 작다!


올 때에는 S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왔다. 이 나라 소비자 유통업을 꽉 잡고 있는 건 K마트다. 우리가 간 S마트는 협동조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기분 탓인지 상품 진열이나 포장이 무... 척.... 느렸다...... 연어를 1kg 정도 샀는데 천천히 꺼내서... 천천히 자른 뒤... 천천히 무게를 재고 잘 맞지 않자 천천히 조금 한 덩이를 더 떼어.... 1킬로를 맞춘 뒤 천천히 포장했다.... 모든 것을 후딱후딱 해치우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조금 낯설었던 장면. 급할 거 없다면 나쁠 것이야 없다.

 



그날 저녁에는 인근 도시 에스포에 사는 다른 가정의 저녁에 초대받았다. 레바논에서 온 FCP 참가자 루나가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 집이었다. 우리 가족이 할아버지 80세 생신잔치에 가느라고 나를 잠시 맡겨둔 것 같았는데, 하루 종일 준비한 훌륭한 연어 바비큐를 대접받았다. 


남서쪽 해안이 보이는 테라스에서 연어 바비큐를 먹으며 3시간 정도 대화를 한 것 같다. 오후 10시가 다 됐을 때쯤의 석양.

내 가족은 소위 말하는 아주 '전형적인 핀란드인'이었다. 매우 수줍고, 친해지기 전까지는 말을 별로 하지 않고, 대화가 중간에 뚝뚝 끊기며 침묵이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가족이다. 이날 저녁에 만난 가족들은 그와 달리 꽤나 활달했다. 시시콜콜한 수다부터 레바논과 한국과 핀란드의 정치-사회까지 오가는 꽤 깊은 대화를 하다 보니, 마당 너머 바다로 해가 저물어갔다. 바로 이웃집도 아닌데 한 번 인연을 맺은 뒤로 아예 가족단위로 친하게 지내는 것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주일인 일요일 오전에는 내내 집에서 쉬다가 오후에 헬싱키 도심 공원에서 열리는 음악 축제를 보러 갔다. 헬싱키대에 다니는 큰아들이 잠시 합류했다. 지금은 잠시 집에 들어와 있는 둘째 딸도 방학이 끝나면 이사를 갈 예정이라며 오전 내내 엄마와 인터넷으로 집을 찾아보았다. 주말에는 클리어런스 마켓(각자 팔아치워야 할 물건들을 들고 나오는 벼룩시장)에 가서 재킷은 팔고 테이블을 하나 구해야겠다며 일정을 알아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독립을 하는 건 이 동네에서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집 값이 비싸지만, 적어도 학비 부담이 전혀 없고,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지원도 많으니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다고 한다. 부부도 자녀들이 모두 독립하면 집이 너무 커진다며 절반을 떼어서 학생이나 신혼부부에게 세를 놔줘야겠다며 상의를 한다. 모든 게 굉장히 자연스러운 수순 같아 보였다.

우연히 핀란드 슈퍼스타 아이삭 엘리엇 공연을 봤다. 하지만 핑크 이어 플러그를 한 아기가 시선강탈

음악축제장에서는 헤드폰처럼 생긴 어린이용 귀 보호장비를 쓴 아이들이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출산율 자체가 아주 높은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가족들이 눈에 많이 띄는 것은 야외활동을 즐기는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올 시간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은 사교육을 별로 받지 않고, 어른들은 업무시간 외의 개인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시간이 생기면 가족과 함께 보내는 데에 쓴다. 전날 저녁에 초대받은 가족에서도, 거리에서도, 공원에서도 어디에서나 어린아이들이 엄마 아빠에게 살갑게 매달리며 노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헬싱키 외곽의, 숲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동네에서 보낸 평화로웠던 주말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종종 생각났다. 이곳에서 정시에 퇴근한 뒤 남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소문날까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더욱 그러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좋아하는 에세이, <게으름의 대한 찬양>(사회평론)의 몇 구절이 떠올랐다.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야 한다고 해서 나머지 시간이 반드시 불성실한 일에 쓰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중략) 현재보다 더 많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 교육의 목표에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항목이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필수적이다."
"행복한 생활의 기회를 가지게 된 평범한 남녀들은 보다 친절해지고 서로 덜 괴롭힐 것이고 타인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중략)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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