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웃지 않아도 당황하지 마세요
북유럽 사람들은 무한히 낙천적이고 밝을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밝고 즐거운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사람들과 달리 핀란드인들은 샤이하기로 유명하다. 낯선 사람에게 무뚝뚝하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과묵하다. 핀란드인들의 국민성은 하도 유명해서, 핀란드 관광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렇게 쓰고 있을 정도다.
WHAT ARE THE FINNS LIKE? 핀란드인들은 어떤가요?
Finnish people are warm, open and sincere, even though they might tell you the exact opposite. 핀란드인들은 사실 따뜻하고, 개방적이고, 진실됩니다. 설령 그들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겠지만 말이죠.
핀란드인들의 이런 성격은 하도 유명해서, 자기들 스스로도 자조적인 농담을 많이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내향적인 핀란드인은 대화할 때 자기의 신발 코를 쳐다보고, 외향적인 핀란드인은 당신의 신발을 쳐다볼 것이다." 그 외에도 수십수백 가지의 이런 Finnish shyness를 자조하는 농담들을 구글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핀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지만, 실제로 수많은 핀란드인들은 그저 무표정으로 이야기한다. "우리가 제일 행복하다고요? 그럴 리가."
그들은 아주 개인주의적이고, 사교적인 파티의 여왕과는 거리가 멀다. 모르는 사람과 갑자기 어울려야 하는 것은 식은땀이 나도록 괴로운 일이고, 버스를 타고 있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칠 뻔해도 기사님께 말을 하지 못해 결국 다음 정류장까지 가서야 자연스러운 척하면서 내린다. 우리나라에는 <핀란드에서 온 마티>라는 제목으로 올해 초 번역 출간된 Finnish Nightmare의 '전형적인 핀란드인' 마티를 보면 내 안의 모든 내향성을 끌어모은 것 같은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난다. 커버 사진이 바로 마티의 Finnish smile, 그렇게나 드물다는 핀란드인의 미소다.
만약 당신이 업무 목적으로 핀란드를 방문한 적이 있다면 "사람들 모두 친절했는데?" 하고 의아해할 것이다. FCP라는 공식 프로그램에 참가한 우리 역시, 모든 사람들이 미소를 지으며 모든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줬기 때문에 '그냥 고정관념에 불과한 건가?'하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단 한 사람, 홈스테이 주말에 나를 1박 2일이나 재워주고 놀아줬던 그 가족의 아버지만 빼고 말이다. 그는 정말 기분이 좋을 때에도 커버 사진으로 해놓은 마티의 미소 이상으로는 웃지 않았다.)
헬싱키에서 우연히(?) 만난 주핀란드 한국대사관의 모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핀란드인들의 샤이함이 빛을 발하는 건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 사적인 인간관계에서라고. 일로 만난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은 아예 남남과 친구, 애인, 가족이 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다. 비즈니스로 만난 사람과 내 사적인 인간관계 사이에는 거의 '넘사벽'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그 핀란드인은 그게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한 것뿐이다. 당신이 좋아서도,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서도 아니다. 당신과 그가 흉금을 터놓는 친구가 될 확률은 그래도 꽤나 당첨률이 높은 정도의 로또와 비슷할 것이다. 내가 만났던 대사관 분이 핀란드에 부임하고 몇 달 뒤, 현지인 친구의 여름 별장에 초대받아서 간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그건 "아주, 아주,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그나마도 그와 현지 친구 사이에 한 다리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반대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핀란드인들의 이런 국민성은 일 년의 절반이 춥고 어두운 겨울이어서기도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극도로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무례할까봐 조심하려는 습관이 몸에 밴 것이다.
낯선 사람들과 있을 때에도 굳이 의미 없는 수다를 떨어 빈 공간을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침묵은 어색한 것이 아니라 그냥 침묵일 뿐이다. 홈스테이 가정에서도 매번 들었던 말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아주 자연스러우니까, 무언가 해야 할 것 같다는 압박을 받지 말고 그냥 편하게 있어요"였다.
말을 걸었을 때 리액션이 즉시 튀어나오지 않아도 '내 말이 재미가 없어서 그런가?' 하고 민망해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원래 침묵을 잘 견디고, 조금 생각한 뒤에 말한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때에도 연극배우 같은 톤으로 과장된 몸짓을 섞어 말하는 미국인들이나, 100미터 밖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중국인, 웃을 때에는 반드시 물개처럼 손뼉을 쳐대는 한국인들과 달리 '아주 조용히' 이야기한다.
만약 당신이 작은 노력을 기울여 '넘사벽을 넘고' 핀란드인과 친구가 된다면, 그 무뚝뚝한 사람들이 어느 순간 (비록 조용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다쟁이로 바뀌는 순간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한 번 말문이 트이면 예금 금리 변동률에 필적할 만큼 정적인 표정과 억양으로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쉬지 않고 이야기하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핀란드인들이 '무뚝뚝하다'라고 설명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샤이하다고 표현하고 싶은 이유다.
지금까지 다녀본 한국 밖의 어떤 곳에서보다, 나는 핀란드에서 가장 평화롭고 나 자신의 감정이 온전하다고 느꼈다. 늘 꽉 들어찬 인구밀도 속 나는 사회적 관계의 압박 속에 늘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전전긍긍하지도 않았고, 당당해 보이는 남과 위축된 나 자신을 비교하며 괴로워할 일도 적었다.
핀란드는 인구밀도가 낮고, 호수가 많고, 자연이 아름답다. 하지만 나에게 평온을 가져다준 정말의 것은 이곳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다정한 개인이고, 남들에게 목매지 않는 강인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