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출산, 보육으로 이어지는 케어

기본적이지만 부족함 없는, 공평한 출발선

by 홍정수

출발선이 다르면 아무리 뒤늦게 노력해도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우리나라를 압도한 지 벌써 몇 년째다. 한 인간이 부족함 없이 자라날 수 있도록 사회가 보장할 수 있는 공평함은 어디까지일까. 핀란드가 전 국민에게 제공하는 복지는 다시 말해 '같은 출발선' 서비스고 부를 수 있다.




임신하는 순간 시작되는 양육복지


핀란드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타이틀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럴 리가 없다"라고 하지만, '아이를 기르기 좋은 나라'라는 수식어에는 전혀 이견을 달지 않는다. 모성보건 정책의 큰 목표는 임신부와 태아, 신생아의 건강을 최대한 잘 관리해 전체 가족의 웰빙을 유지하는 것이다. 평평한 출발선을 다지는 가장 기초적 케어다.


Töölö 지역에 있던 NEUVOLA(네우볼라, maternity and child health clinic)을 방문했다. 왼쪽은 백신접종 안내, 오른쪽은 신생아 측정용 키트.

아이를 임신한 뒤에는 최소한 네 번의 검진을 거쳐야 한다. 아빠도 마찬가지다. 가정 방문을 요청할 수도 있다. 임신 기간 중에는 지역의 예비 부모들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주선해주기 때문에, 출산 후에도 정보 공유 네트워크가 이어진다. 초보 부모에게는 상당히 유용한 서비스인 셈이다. 출산 후에도 1박에 50유로 안팎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병원 병실에서 며칠 정도는 머물 수 있다.


물론 한부모 가족, 10대 부모도 문제없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10대 임신은 제대로 된 성교육과 낙태 합법화의 영향으로 흔하지는 않다. 낙태는 이 사회에서 논쟁적인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가톨릭 신자인 외교부 장관이 과거 낙태 반대 집회에 참석한 것이 더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핀란드의 그 유명한 베이비박스 구성품

출산을 하고 나면 모든 엄마들은 정부에서 '베이비박스', 즉 핀란드 정부에서 지원하는 마터니티 패키지(maternity package)를 받는다. 1938년 시작돼 80주년을 넘은 유서 깊은 박스다.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한 박스에 담겨 온다. 박스는 아이 침대로 쓰기에 딱 맞는 크기다. 제도 도입 초기에는 가난한 여성들이 아이를 최소한 잠이라도 깨끗한 곳에서 재울 수 있도록 배려해 침대 겸용 박스를 제공한 것이다.


베이비박스는 부모가 아이를 맞이하는 날, 즉 출산 또는 입양 예정일 2달 전에 신청만 하면 받을 수 있다. 원한다면 현금 140유로로 교환받을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전체 부모의 1/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물품 퀄리티가 상당히 좋을뿐더러, 모두 비매품이기 때문이다. 젠더 이퀄리티를 지향하는 핀란드답게, 디자인 역시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해마다 디자인 컨셉도 바뀐다.(언박싱 영상 링크)


베이비박스에서 눈에 띄는... 아기 대신 부모를 위한 몇가지 물품들


흥미로웠던 것은 아기자기한 아기용품들 사이에 들어있는 생리대, 콘돔, 러브젤이었다. 여성이 갓 출산한 뒤 망가진 몸이 회복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한 만큼, 당분간은 피임을 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베이비박스에 살짝 담은 셈이다. 한편, 핀란드 베이비 박스로 검색하면 나오는 링크(finnishbabybox.com)가 있긴 하지만 여기는 세 명의 아빠가 세운 영리 기업이다. 해외에서도 구매 가능하니, 궁금하다면 맛보기로 구경할 만하다.




'무엇을 배울지' 배우는 영아 교육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생후 1년 early childhood education부터 공교육 시스템에 편입된다. 이어 유치원에 해당하는 pre-primary education,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합친 개념의 중등종합학교 comprehensive school,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upper secondary school 또는 vocational institution 교육을 거쳐 대학 진학으로 넘어간다. 일생에 걸쳐 1만 3000명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교육정책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는 나라다.

교실 내부는 의외로 별 색깔 없이 심플했다.


우리가 방문한 유아교육시설인 프란제니아 Franzenia 데이케어센터는 헬싱키 시가 운영하는 곳이다. 1913년 지은 대학교 건물을 개조한 것이라 규모가 크고 천장도 상당히 높았다. 아이들의 하루 일과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오전 8시 아침식사로 시작해 오후 4~5시경 귀가한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실외활동을 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독한 한겨울에도 어린 아이들을 밖에 내놓는다. 핀란드의 대표적 국민성인 '시수(sisu)'가 나타나는 지점이다.


교실별로 장난감이나 아이들이 직접 만든 작품들이 펼쳐져있다.


선진 공립 보육시스템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모두 무료로 이뤄질 것 같지만, 실제 취학 전 단계에서 교육비는 기본적 유료다. 핵심은 소득에 따라 상당히 달라진다는 점이다. 고소득층의 경우 최고 월 290유로(30여만 원) 수준이지만 소득이 낮을 경우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영유아 보육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평등이며, 이는 경제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아이 한 명당 정부에서 지원하는 금액은 11,000유로. 센터는 교육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며, 부모는 아무것도 추가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


비교적 고학년(?)들을 위한 교실. 오른쪽 나무탑은 성인 키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국가와 지자체가 마련한 두 가지 가이드라인을 따르면 세부적인 커리큘럼은 각 센터에서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어린이집, 유치원부터 이미 사교육 시장이 점령해버린 우리나라에 비하면 커리큘럼이 체계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재미있게(playful)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인형을 갖고 놀지, 운동을 할지도 아이 스스로 결정한다. 아이들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곳이 아니라 '무엇을 배워야 할지'를 배우는 곳 셈이다. 교사들도 학부모 면담을 통해 개별 아이들의 1년 치 계획을 미리 만든다. 아이들의 관심사와 경험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교사와 부모와 함께 방법을 고민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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