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녀온 어학연수 패키지 프로그램에는 필리핀 어학원 4개월, 호주 어학원 3개월이 포함되어 있었다.
호주에는 워킹홀리데이비자로 1년을 머무를 수 있지만 그 중 3개월은 어학원을 다녔다.
학원 수업을 오후까지 듣고, 이후 시간대에 병행할 수 있는 파트타임 잡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3개월간은 어학원 수업에 집중하고 그 이후부터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학원에서 레벨테스트를 친 결과 예상대로 Intermediate이 나왔고, 해당 레벨의 수업에 배정을 받았다.
교실에 들어선 순간 까만 머리의 학생들이 15명가량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5명이 한국인이고, 6명은 중국인/대만인, 3명은 일본인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 유일한 금발머리 여학생이 한 명 앉아 있었다. 그래도 외국인처럼 보이는 그녀가 우리 중 영어를 잘하겠지라는 편견을 가지고 그 학생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 학생 양옆자리가 비어 있기도 했다.
수업은 영어신문을 중심으로 진행이 되었다. 첫날 수업을 들었는데 뭔가 탐탁지 않은 느낌이었다. Intermediate 반이었지만 학생들의 참여도나 실력이 저조한 것이 느껴졌다.
일주일이 지나고, 2주가 지나면서 그 반의 수업은 '말하기'가 아니라 오롯이 '읽기'와 '듣기'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과 강사가 신문이라는 매개체만을 가지고 안일하고 판에 박힌 시간 때우기 식의 수업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3개월을 이렇게 시간 보내는 것이 낭비라고 느껴져 한 달이 되면, 남은 2개월치 수업은 그냥 drop 시키고 바로 일자리를 구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한 달이 끝나갈 무렵, 강사가 나에게 Upper intermediate반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 수업도 별반차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기대 없이 반을 옮겼는데 호주에서의 진짜 영어공부는 거기서부터 제대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Brad라는 강사가 운영하는 그 반의 수업은 '말하기'중심이면서도, 어휘표현과 듣기도 교재를 통해 같이 진행되었다. 아직도 강하게 기억에 남았던 것은 Brad가 진행했던 '말하기'수업의 콘텐츠 들이었는데, 수업에 참여하는 동안 말하기 실력이 향상되는 것이 즉각적인 체감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먼저 수업 시작은 교재를 통해 어떤 주제나 상황에 적용되는 5~6가지의 표현들을 익힌다. 이 때는 쓰고, 듣는 것이 main이다. 그 후에는 반 학생들이 이를 응용하도록 해서 내재화(각인) 시킬 수 있는 경험을 하도록 한다.
① 상황극을 통한 말하기: 학생들끼리 1:1로 짝을 짓고, 선생님은 미션을 준다. 어떤 상황을 주고, 오늘 배운 표현 중에 '0000'를 넣어서 즉흥적인 짧은 상황극을 만드는 것이다. 조금 쑥스럽고 낯간지럽긴 하지만 상대방과 나는 다른 학생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 이미 알고 있는 문장과 표현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 중간에 주어진 미션인, '0000'이라는 표현을 끼워 넣는다. 이 방식은 긴장감 가운데, 상대방의 말에 맞춘 즉흥적인 스크립트를 머릿속에 만듦과 동시에 입으로 내뱉으면서 어느 순간에 새로 배운 표현을 끼워 넣을지 타이밍을 보다가 그 순간을 캐치하고 그에 대한 상대편의 즉흥 대화 반응까지도 수집하게 된다. 이렇게 응용을 하면 새로 배운 표현은 머릿속의 거대한 언어 사전을 뒤져야 하는 것이 아닌, 상황적 이미지 영상으로 자리 잡아 다음번에 바로 입 밖으로 꺼내기가 용이해진다. 파트너를 바꾸어가며 미션도 계속 바뀌기 때문에 긴장감은 높지만 내가 '응용해서 사용해 봤다'는 경험이 꽤 보람된 느낌으로 남는다.
② 사진 설명하기: 학생 1명에게 어떤 사진이 주어진다. 이 학생은 사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10초 정도 사진을 해독하고 스토리를 구상할 시간이 주어진다. 이 때도 미션이 주어진다. 설명을 할 때 '0000'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 나와 사진을 손에 들고 마주 앉은 다른 모든 학생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면, 사진을 본 학생들이 마구 질문을 한다. '이 사람은 누구야?', '여기는 어디야?', '이 집에는 누가 있어?', '두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이 물건은 누가 준거야?' 등등 돌발 질문이 쉴 새 없이 들어오면, 그 모든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보이는 사실만을 말할 필요는 없다. 질문하는 학생도 사진에 대한 모든 것을 궁금해해야 하기에 다양한 질문을 구사해야 하고, 답변하는 학생은 스토리텔러가 되어 사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이면의 스토리들을 만들어내어 답변을 하면 된다. 누군가에게 '정보'를 전달하면서 바로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 또한, 단조로운 '말하기'가 아니라 '주고받는 연결성 있는 대화'를 경험한다는 측면에서 실력 향상으로 연결이 되었다.
Opic테스트에도 이와 유사한 테스트가 있다. 사진을 보고 그 내용을 영어로 '묘사'하라는 문제이다.
수업시간을 이렇게 보내니 반 학생들과도 금방 친밀함이 생겨 교류할 수 있게 되고, 남은 2개월의 목적에 맞는 알찬 시간으로 채울 수 있어 보람되었다.
지난달 부모님 댁에 내려갔을 때 학창 시절 각종 편지를 모아둔 통을 구경하다가 호주 어학원에서의 마지막 수업 종강 시 전달받았던 평가지를 보게 되었다. 다시 읽어보니 내 생애 이런 극찬으로 가득한 평가를 누군가에게 들어본 일이 있었나 싶다. 열심히 하는 학생이긴 했지만, 이런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를 주는 선생님이 참 멋진 사람이다.
맨 마지막에 'Always choose topics you are passionate about to maintain your level of interest and motivation'이라고 적혀 있는데, 정말로 그 수업은 Brad가 '흥미'와 '동기부여'를 팍팍 넣어주었기에, 학생들의 영어실력이 늘 수 있었고 그런 직업의식을 가지고 가르쳐주는 선생님을 만났던 것도 참 감사한 일이었다.
학원에서는 ILETS 반을 수강하는 것을 권했으나, 어차피 학업적인 영어를 배우기 위한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었기에 학원수강은 마무리를 했다. 다음 글은 생계를 위한 여정과 추억거리를 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