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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을 걷다 Mar 15. 2019

제주를 걷다 - 4

제주 올레길 5, 6코스

2018년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제주 올레길을 걸었다. 16개 코스 220km 정도를 걸었는데 완주하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내가 걷고 싶은 올레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에 더 행복함을 느낀다. 어느 때고 난 이 길을 걷기 위해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유홍준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었다. 책을 읽고 책에 소개된 산사를 다니면서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고 아름다움을 느낄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던 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단순히 자연과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닌 세월의 역사와 지나온 사람들의 흔적을 느끼는 것이 여행의 참맛이자 재미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작년 봄 걸었던 제주 올레길을 돌이켜 보니 올레길은 단순히 걷는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새삼 알게 된다.


전날 친구를 보내고 조금은 기대했던 게스트하우스에서의 하룻밤. 게스트하우스 투숙객들이 모여 함께 음악도 듣고, 술도 함께 마시고, 얘기도 하고 그런 밤을 조금은 기대했지만, 3월 초는 대학생들에게도, 여행객들에게도 그런 시기가 아니었나 보다. 너무 일찍 잤던 탓인지 아침 6시에 깼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출발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7시 즈음 짐을 챙겨 출발했다.


5코스 : 남원 포구 - 쇠소깍 다리, 13.4km (4-5시간 소요)


5코스는 서귀포 시내로 가기 전 코스이다. 4코스에 있던 표선리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인 것에 비해 5코스에서 만난 곳들은 낯선 지명들을 가진 곳이 대부분이었다. 큰엉, 신그물, 위미, 곤내골, 조배머들코지, 넘빌레 등 제주도를 조금 안다고 하는 사람도 이런 지명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난이도 중 코스. 제주도를 수십 번 왔었지만 익숙한 지명이 없었던 곳이다.


큰엉은 제주도 바닷가나 절벽에 뚫린 구멍을 의미하는 제주도 방언이고, 조배머들코지는 구실잣밤나무(이런 나무가 있는지 몰랐다)를 의미하는 조배, 돌 동산이란 뜻의 머들, 해변에서 돌출되어 나와 있는 땅이란 뜻의 코지를 의미하는 지명이다. 이 길을 걸을 때 누군가 함께 걷는 이가 이런 것을 얘기해 줬다면 잠시 멈추고 길에서 벗어나 해변이나 마을을 둘러보았을 텐데 당시는 바다를 보며 그냥 지나쳤다.


이른 아침 걷던 남원읍의 해변가. 기암석들로 유명한 이곳을 당시는 그냥 지나쳤다.


제주에서 덜 알려지고 좋은 곳이 있다면 이 동네가 아닐까 싶다.


낚시를 좋아하는 오랜 친구와 함께 왔으면 좋았겠다 싶은 곳이었다. 낚시를 안 한 지 오래되었는데 흐린 날 바다를 보면 낚시 생각이 난다.


올레길 코스에는 중간 지점에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 5코스는 위미 동백나무 군락이 있는 동네에 이 장소가 있다. 올레길 걷기에는 시작점, 중간점, 종료점에서 '올레길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어야 하는 '숙제'가 있는데, 올레길을 완주하고 이 스탬프를 다 찍으면 기념품을 준다. '올레길 패스포트'는 온라인에서 구매할 수 있고 올레길 여행자센터나 일부 지역에서는 편의점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스탬프 찍기. 깔끔하게 찍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중간 스탬프는 간혹 위치를 찾지 못해 동네를 헤매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스탬프 찍으려고 올레길을 걷고 있나 자책도 한다.


위미 동백나무 군락 마을을 지나 항구에 도착할 즈음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아침 열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 아침을 거른 탓에 배도 고프고, 따뜻한 커피가 너무도 그립지만 이른 시간에 문을 연 카페가 없다. 몇 곳을 지나치다가 들린 '서연의 집' 카페. 이곳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여주인공 한가인이 남주인공이었던 엄태웅에게 설계를 부탁해서 지은 집으로 나온다. 영화사에서 영화 촬영 이후 카페로 개조해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제주에 저런 집을 짓고 살고 싶다'라는 소망을 갖게 했던 기억이 있다.


카페 벽에는 사진과 영화 대사가 쓰여 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많다.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카페로 개조해서 바닷가를 바라보며 차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당시에는 항구에 공사가 한창이었다.


세월이 지난 다음에 따지지 말고 그때 물어봤어야지. 세월이 지난 후에 "그때 너 좋았했었는데"라는 말은 결혼을 앞둔 남주인공 엄태웅의 마음을 흔들었다.


카페 2층에서 찍은 동영상. 영화에서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이 이층이 참 멋있다고 느꼈었다. 인근 주택과 너무 밀접해서 옆집에는 어떤 분이 살고 계실까 엉뚱하게 궁금했다.


밖에 비는 많이 내리고, 너 어떡할래?


제주도의 이름 봄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조용한 봄비라면 우비를 입고, 운치 있게 걸을 수도 있으나, 센 바람에 거센 파도라도 치는 날에는 감히 걸을 생각을 못하게 된다. '너 어떡하냐'라고 걱정해 주는 문구를 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부지런히 걸은 덕분에 오전 11시, 5코스 종점에 도착했다. 원래 계획은 이곳에서 하루를 머무는 것이었는데 더 걸을까 살짝 욕심이 났다. 예약할까 했던 숙소 근처에서 잠시 고민을 하다가 점심을 먹었다.


동네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자고 들어와서 이런 점심을 먹었다.


나중에 다시 가면 이 식당이 있을까? 지역 마을에서 운영하는 제주의 밥상. 서울의 고급 한정식에서 먹는 점심 메뉴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맛있는 식사를 했다.


잘 알려진 제주 맛집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이름 봄 비 오는 올레길에서 만난 최고의 점심 식사였다.


6코스 : 쇠소깍 다리 - 서귀포 제주 올레 여행자센터, 11.6km (4-5시간 소요)



점심을 잘 먹고, 5코스 13km에 이어, 점심 '밥심'을 빌어 11km 6코스를 걷기 시작했다. 6코스의 첫 시작은 쇠소깍. 쇠소깍은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으로 멋진 하천 계곡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비가 와서 미처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쇠소깍의 '쇠'는 효돈마을을, '소'는 연못을, '깍'은 끝을 의미한다고 한다. 올레길을 걸으며 이런 어원이 있는 제주 마을을 알아가는 재미도 함께 느낀다.


쇠소깍 해변. 검은흙 해변이 있고, 이렇게 바다와 만난다.


쇠소깍은 알려진 관광지다. 사람을 피해 조용히 사진 한 장 찍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씨의 제주 해변.


들려볼까 했던 카페 펜션. 게우지코지라는 글씨가 멋있다.


검은여 해안. 멀리 섬이 보인다.


걷다 보면 눈 앞에 섬이 다가와 있다. 섬 반대편에 숨어 사는 사람이 없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검은여의 '여'는 물속의 보이지 않는 바위나 암초를 의미한다. 딱 보면 숨어 있는 암초는 없어 보이는데 조금 더 멀리 그런 곳이 있나 보다.


6코스를 마칠 즈음 정방폭포에 도착한다. 내려가지 않고 입구에서 사진만 찍었다. 나무에 가려져 있어 선녀 목욕하는 장면을 몰래 찍는 느낌?


6코스 종점은 서귀포시내에 있는 여행자센터다. 서귀포 시내에 도착하여 올레길을 찾는데 조금 애를 먹었다.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매다가 꼭 정해진 길이 아니라 시내 길이니 다른 길로 가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종착점인 여행자센터를 바로 찾아갔다. 서귀포 여행자센터에는 게스트하우스, 카페가 함께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내리 25km를 걸었던 탓에 발걸음이 무겁고 피곤이 몰려왔다. 겨우 25km라고 생각했던 오만함을 발바닥에 생긴 물집이 꾸짖는 듯하다. 겨우 이 정도에 물집이 생기면 하루 40km씩은 어떻게 걸을까?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미리 예상했어야 하는 것을 생각 못하고, 준비하지 못한 대가는 온전히 걷는 나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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